최악의 황사가 찾아온 5월 초의 어두운 저녁이었다. K는 노트만 두고 찻집에서 나가버렸고 나는 밤보다 더 어두운 대낮 거리로 걸어 나가 잠깐 동안 방향을 잃고 헤맸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지만 K는 한 번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했다. 찜질팩 판매사원인 K의 남편이 언젠가 내게 한 말이 기억난다.
“하루 종일 집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라고는 없어요. 애가 있나요, 그렇다고 늙은 부모를 모시나요, 그런데 죽고 싶대요.” K 남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답답하기는 K도 그 남편도 막상막하였다.
K는 한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강남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어떤 집에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노트도 전해줄 겸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식구가 둘뿐인 부부가 방이 세 개나 되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넓은 아파트에 살았다. K가 과일을 깎고 차를 준비하는 사이에 집 안을 둘러봤다. 다른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안방에 달린 화장실이었다. 약간 각이 진 벽 아래 동그란 욕조가 있었고 욕조 위로 붉은 꽃잎 무늬가 뚝뚝 떨어지듯 박혀 있었다.
벽에 붙은 행거에 걸린 희고 뽀송뽀송해 보이는 샤워 가운 두 벌이 보였다. 작고 앙증맞은 화장품이 가득 들어찬 수납장과 세면대 주변은 지나치게 깨끗해 보였다. 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고 가파르게 보이는 강변도로를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자동차 소음이 너무 심해서 금세 창문을 닫았다.
K는 흰 잠옷을 입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질끈 묶더니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바구니를 양 손으로 들고 나와서는 뚜껑을 열어젖혔다. 바구니 안에는 흰색 미농지에 들어 실타래처럼 붙은 흰 약봉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내가 이것만 먹으면 이렇게 하루 종일 잔단다. 하루가 딱 이등분되어버려. 그래서 다 숨겨놨어. 이걸 안 먹으면 죽는다는데, 왜 그런지 난 이걸 먹으면 죽을 거 같아.”
K는 어찌할 바를 몰라 너무도 태평하게 절벽 위에 서 있는 어린 양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노트를 돌려줬고 K는 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올려둔 노트를 집어갔다. “그래서 어땠니?” 어쩌면 그 순간 나는 김 작가가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어야 했다. 겸손, 겸손, 그리고 또 겸손. “너무 유치하고 문장도 읽기가 어려워. 오문투성이야. 넌 문장 연습부터 해야 될 것 같아.”
K가 자리에서 천천히 읽어나 자기 방으로 가서 담배를 들고 나왔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느낌을 말한 것뿐이었다. K는 두 다리를 벌려 세워 앉은 채 속옷이 보이는 줄도 모르고 담배를 피우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굳어졌고 점차 푸른색을 띠며 무서워졌다. “내가 아는 작가분이 우리 같은 애들이 꼭 읽어야 할 책 리스트를 주셨어. 너한테도 줄게 그걸 먼저 읽어봐. 그분은 정말.” “그만 해.” 나름대로 빅카드라고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그 순간 K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몹시 불편했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K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괜찮니?” 내가 소파에서 내려가 바닥에 앉은 K를 향해 몸을 낮춰 다가가는 순간 그녀가 한쪽 발을 높이 들어 내 얼굴을 냅다 차버렸다. 눈알이 빠졌거나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이내 피가 똑똑 떨어졌다.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보겠다며 K가 몸을 가까이 해 다가왔다. 그사이에 그녀의 흰색 잠옷에 피가 떨어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화가 나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K와 나는 작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끼적인 글을 가지고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더 웃긴 건 그때 막 퇴근한 K의 남편, 바로 그 찜질팩 판매사원의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