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297년 5월 17일에 이탈리아의 카르모나 저택에서 태어났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본 챕터는 13세기의 유럽 역사를 다루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훠스카는 13세기부터 지금껏 죽지 않고 살아 있어 파리의 광장을 돌아다니는 불사의 인간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는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 그만 살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글짓기 교실이 시작되기 전 늘 김 작가는 머리 식히기 게임 같은 걸 했다. “우리 남편 하고 절대 결혼하지 않기.” “절대 결혼이란 건 하지 않기.” “결혼은 안 하고 연애만 하기.” 회원들 모두 비슷한 대답을 하기 일쑤였다.
회원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 사이 나도 훠스카 식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하곤 했다. 내가 만일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훠스카의 답은 노우였다. “나는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지요. 앞으로 만년이 지난다 해도 난 잘못을 저지를 테지요. 사람은 결국 진보를 못하는 법이지요.”
늘 포도주와 비에 절어 있는 것 같은 불사의 인간 훠스카, 오랜 시공간을 떠돌다 돌아온 훠스카를 현실의 자기 곁에 끌어내려 뜨겁게 사랑하고 싶은 연극배우 레진느, 두 사람의 끝도 없는 황당한 대화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켰다.
글쓰기를 함께한다는 연대감은 여자들을 그토록 강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던 걸까. 그즈음 사실 계동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도 그 일에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 멤버와 김 작가가 깊숙이 관여했다고 믿고 있다. 아니, 그녀들이 벌인 일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회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글쓰기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전화연락이 되지 않아 모두들 걱정을 했고 그러다 한 회원이 집에 찾아갔다. 보나마나 부부싸움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나온 그 회원의 얼굴은 붉고 푸른 멍과 상처투성이였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걸음조차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얘기를 하는 도중에 코를 훌쩍이며 울다가 욕을 하다가 뭔가에 원한이 맺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회원들이 글쓰기는 안 하고 밤마다 모여 뭔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내가 방에서 나오면 모두들 입을 닫았다. 커다란 지도를 펴놓고 앉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글짓기 교실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는 분위기였다.
어느 정도 얘기가 끝나면 모두들 두터운 외투에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낀 뒤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녀들은 가회동에서부터 비원 담장 옆길까지 밤거리를 쏘다니면서 밤 훈련 나온 예비군 아저씨들처럼 동네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1월의 깊은 겨울 밤, 얼굴에 멍이 든 그 회원의 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다가 옛날 궁녀들이 모여 빨래를 했다는 비원 빨래터의 움푹 파인 네모난 틀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맞은 상처도 없고 넘어진 흔적도 없이 그냥 돌로 만든 네모난 빨래터 안에 들어가 자다가 얼어 죽은 거라고 했다. 작은 동네에 일어난 일치고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모두들 눈만 뜨면 그 얘기를 했다. 경찰들도 수시로 찾아오고 한동안 동네가 몹시 시끄러웠다.
그 남자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은 그 회원이 글짓기 교실에 나타났다. 가슴 한가득 술과 안주를 사들고 온 그 여자의 얼굴 표정은 미묘했다. 그날 모든 회원들이 모여 깔깔거리고 웃으며 술 파티를 벌였다. 서로 얼굴만 쳐다봐도 웃음이 나는지 별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깔깔거렸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입에 있는 맥주를 울컥 쏟아낼 정도로 여자들은 신이 나 있었다. “그런 쓰레기들이라니. 자 축하! 우리 이제 더 열심히 살자구.” 여자들은 자꾸만 잔을 부딪쳤다.
회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그녀들이 쓴, 내가 쓰레기라고 명명한 그녀들의 허접한 글쓰기 노트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 상상력은 계동의 밤거리를 쏘다니던 여자들의 뒷모습을 자꾸 따라가고 있었고, 여자들이 갑자기 깊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순간 여자들의 얼굴은 마귀할멈이나 쥐할멈의 얼굴과 다름없이 너무나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