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의 매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보고, 그 풍경에 헤어진 애인과 보냈던 시간이 한 장면씩 들어갔다. 그리고 언젠가 함께 갔었는지, 가지 않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부산 자갈치 냄새가 물씬 나는 풍경을 감상하는 화자의 아픔과 회상이 뒤죽박죽된 유치한 글. 중요한 건 내가 그때까지 부산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자 이거 받아.” J 작가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는 반으로 접혀 있었다. 비밀문서, 아니면 수업료 청구서, 설마 편지.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는 단순한 동작 하나에 관한 명령조차도 뇌가 제대로 실행을 하지 못할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실은 마음이 온통 다 ‘지난번보다 좀 나아졌다’는 평가에 가 있어서 그 얘기를 더 듣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묘사는 배워서 할 수도 있어. 그러나 작가의 사고 과정이 소설에 드러나려면 공부를 해야 해. 많이 읽어야 한다구.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작가들이 진실한 문장 하나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나는 J 작가가 준 그 종이를 ‘J 칙령’이라고 불렀다. 그건 놀랍게도 내가 읽었으면 하는 책들의 리스트였다. 국내 작가들, 외국 작가들, 국내 문학 이론서들, 시집들 제목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젠 나한테 그만 가져와. 내 글쓰기도 바빠서 죽을 지경이라구.”
J 작가는 또 한 번 까칠하게 굿바이 멘트를 날렸다. “그래 니네 엄마도 작가라면서 이제 엄마한테 보여드려.” 커피숍 주인이 끼어들었고 나는 순간 J 작가가 그 말에 대한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면 어쩌나 순간 당황했다. “엄마가 팬이세요.” 겨우 한마디 하고는 머리만 숙이고 얼른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J 칙령은 한동안 내 비밀상자 안에 담아 두고 매일 밤 꺼내봤다. 그리고 또 한동안은 다이어리의 앞표지 비닐케이스에 늘 넣고 다녔다. 연애에 미쳐서 정신없을 때는 투명 유리병 안에 넣어 화장대에 올려두고 매일매일 쳐다보기만 했다.
여행을 다닐 때는 여권 안에 네모나게 접어 넣고 다녔다. 비행기 안에서 수면용 안대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난 후, 메마르고 갈색인 중국의 사막 위에서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싶어질 때, 하루 종일 기차 소리만 들리고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미국 서부의 커다랗고 텅 빈 어떤 기차역 앞에서, 작은 바의 소란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바람을 쐬러 나온 일본의 길거리에서, 인디언 썸머가 찾아온 미국 중부의 늦은 가을의 햇볕 아래서 그 종이를 펼쳐보곤 했다.
장소가 바뀌고 시간이 바뀌고 나는 늙어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내가 J 칙령에 의지해 살았는지, 너무나 빨리 죽어버려 이제는 고인이 된 J 작가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나도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나만의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날까.
계동의 글짓기 교실에 돌아온 후 세무서에 나가지 않는 주말이 되면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안채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더 나빠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 방문 앞에 먹을 것들을 갖다 주셨다. 시금치나물, 부침개, 양파장아찌, 흰 찰떡……. 소금간을 해 마늘과 다진 파만으로 맛을 낸 시금치나물 같은 음식은 김 작가와 나는 한 번도 만들려고 시도조차 한 적이 없는 고급 음식이었다. 할머니네 집 반찬을 얻어먹으며 봄의 나른함을 극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