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앉고 싶어 하던 창가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굳이 다른 자리에 앉아 J 작가가 거기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를 넘겨다봤다. J 작가가 두 팔을 괴고 책을 읽는 탁자 끝이 동그랗게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는 순간보다 J 작가가 앉아 있던 그 빈자리가 오히려 J 작가에 대한 나의 존경을 깨닫게 해주었다.
커피숍 주인에게 원고가 든 봉투를 부탁하고 북촌길을 걸었다. 봄밤이면 짙은 안개가 끼어 북촌길의 야트막한 언덕 앞길조차도 막막하게 시야를 가렸다. 당장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타고 아현동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B가 집에 있다면 따뜻하게 안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계속해서 북촌길로만 내달았다.
그후로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는 두 개의 추가 매달려 있었다. 연애와 글쓰기, 그리고 항상 나는 연애의 추를 버리고 글쓰기의 추를 선택하곤 했다. B와의 연애가 그 첫번째 사례였다. 그러니까 내 연애가 실패했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J 작가를 만난 건 이틀 정도가 지난 후였다. J 작가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인사도 건넸다. “좀 마른 것 같네. 졸업했지? 대학은?”
순간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말은 또다시 나를 긴장시켰다.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어때? 내가 학생 개인지도를 계속해줄 수는 없잖아.” 역시 사람 대할 때 적당히 거리 유지하면서 까칠한 건 여전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든가, 지금은 여력이 없다든가 뭔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고를 열어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이 말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손이 떨리고 어깨가 굳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원고를 한 장씩 넘겼다. 원고는 여전히 붉은색 사인펜으로 쫙쫙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알지? 비문이거나 오문.” “네.” 대답을 하고는 원고 한두 장을 더 넘겼는데 이번엔 푸른색 사인펜으로 그은 줄이 보였다. “저기 작가님 이건 왜 이렇게 하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내 원고를 다시 가져가 천천히 뒤로 넘겨가며 자기가 체크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았다. “묘사에 대해서 좀 생각해봤어?” “네.” J 작가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렇게 주인공이 한 행동을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문장이 되지는 않아.” “지난번에 저한테 묘사를 하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입이 부루퉁해져서 항변했다.
묘사, 묘사, 묘사를 해라. 나는 사실 그 말 때문에 일대 혼란을 겪었다. 그런데 묘사가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내 말을 잘 모를 거야. 하지만 간결하고 분명한 묘사 뒤에 반드시 작가의 사고과정이 드러나야 해. 그런 건 묘사가 아니라 진술이지. 작가의 사고, 작가의 판단에서 오는 힘이 있는 진술이 반드시 들어가야 해. 이렇게 주인공이 기차 타고 갔다가 기차 타고 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소설의 다는 아니라구. 묘사와 진술 그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야 해. 좋은 문장이란, 좋은 소설이란 그런 거야. 하지만 학생은 아직 묘사를 잘하기에도 바쁘지.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나아졌어.”
사실 스토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실연한 여자가 헤어진 남자가 갔다고 짐작되는 부산에 찾아가 하루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얘기였다. 모두들 짐작할 수 있듯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게 중심 줄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