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에게는 왜 모성이라는 게 없을까. 계동에 살던 시절 내 고민의 주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표현하면 바로 그랬다. 내 엄마라면서, 나를 낳았다면서 김 작가에게는 왜 모성이라는 게 없는 걸까.
김 작가는 정말 그런 게 없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자식들의 인생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참고 살아가는 게 대세인 시절이었다. 자식들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참고 자식 잘되길 기도하는 게 엄마들의 습성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반대였다. 내가 김 작가의 작고 큰, 그 숱한 사고 수습만도 몇 차례를 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김 작가는 평생토록 제멋대로 살았다. 좋게 말하면 불꽃처럼 순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아주 나빠서 사고부터 치고 보는 식이었다.
모성이라는 것이 자연법칙이 아니라는 것,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는 순간 저절로 여성의 신체 안에 부여되는 선천적 기질이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 알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싱글이지만 성인이 되어 만난 내 가까운 친구들 중에 모성이 없는 애들이 꽤 여러 명 있었다. 모성이 없어도 결혼은 해야 했고 아이는 낳아야 했다.
좀 배웠다는 애들은 미국의 시인이자 여성 운동가인 아드리엔느 리치의 책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의 한 구절을 곧잘 인용했다.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어머니는 어머니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모성은 여성 억압의 가장 나쁜 이데올로기였다. 그녀들은 엄마 역할과 자아실현 사이에서 충돌하다가 가끔씩 흔들렸다. 그나마 이혼하지 않고 아이들이 좀 클 때까지 곧잘 버티던 친구들도 아주 우스운 일로 한순간 나쁜 엄마로 전락했다.
그중 정말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시골에 내려간 친구 부부와 아들아이가 시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아버지가 재떨이를 가져와 담배를 피워 문 순간, 아이가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담뱃갑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던 것이다. “저거 우리 엄마 약인데.”
순간 분위기는 싸해졌다. 평소 꼬맹이한테 여러 번 담배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었다. 그동안 회사와 가정 둘 다 잘 꾸려나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친구는 그 순간 지금까지의 과업은 온 데 간 데 없이 다 사라지고 담배나 피워대는 나쁜 엄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그 정도라면 참을 만하다. 충분히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정도니까. 그러나 김 작가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사고로 치면 대형 사고였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 선생이랑 나랑 같이 살기로 했어.” 무슨 봄바람에 꽃잎 날리듯이 한마디 하고는 커피 잔에 코를 박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김 작가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살기로 했다니까!”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참고 견디려고 해도 참기가 어려웠다. “뭐라구? 어쩐다구? 나한테 다시 말해봐.”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김 작가는 글짓기 교실 바닥 비질을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둘이 그렇게 친해?”
나는 거의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어 김 작가의 스웨터 자락을 길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럼 넌 친하지도 않은 남자랑 살겠다고 하겠니?” 김 작가는 그때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사랑을 얻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여유와 자만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글쓰기 수업을 작파한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대신 같이 라면을 끓여 먹고 오징어를 구워 먹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펑퍼짐하던 내 얼굴은 그 둘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깊은 그늘이 생겨 칙칙하게 변했다.
그나마 아줌마 같던 얼굴은 금세 오십대 중년 여자처럼 늙어버렸고 어느새 이마 위를 덮고 있던 여드름조차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몸 안에 있는 수분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내 몸에 불을 그어대면 금세라도 마른 불이 붙어버릴 것처럼 나는 황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