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고아라가 김옥지에게
1465년 6월 16일
옥지, 보아라. 거두절미하고, 네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다. 네가 잠실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데, 원유를 돌아다니던 그 여인은 헛것도 아니고 누에의 여신도 아니고 분명 산 사람이다. 하기야 놀랐겠지. 백악산 기슭에 숨어 있는 이 원유는 궐 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고, 세종대왕 시절에 심은 천 그루의 뽕나무1가 지천으로 자라나서 녹색 바다를 이루는 곳으로, 우리처럼 허락받은 사람 외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금원(禁苑)이라 부른다. 이 외진 곳에서 밤새 누에를 지키던 피곤한 눈으로 뽕밭에서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니, 까무러칠 만도 하다. 그 분이 그 유명한 소용마마2이시다.
소용마마는 이 금원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만나보면 알겠지만, 조금 독특한 분이라 할까. 원유에 오면 나물이건 나뭇잎이건 심지어 독새기풀도 툭툭 잘라 입에 넣어 맛을 보신다. 사람들 말로는 사람의 먹을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는다고도 하고, 또 주변에 해로운 식물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도 한다. 아주 귀한 풀이나 식물들을 찾아다닌다는 말도 있는데, 소용마마는 수세미를 삶아서 끓인 물로 피부를 매끄럽게 만들거나, 창포 혹은 복숭아 잎사귀를 넣은 물로 얼굴을 해맑게 하거나, 목화의 자색 꽃을 이용해 붉은 기운이 도는 눈썹을 그린다거나, 기분이 좋게 하는 향을 만들어내는 법도 알고 계신다.
하여튼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귀신이 아니다. 주상전하께서 아끼시는 후궁을 귀신 취급해서 되겠냐? 후후, 소용마마가 주상전하의 사랑을 받게 된 이야기는 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상전하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저에 계실 때 이야기인데, 사냥을 즐기는 수양대군께서 꿩을 사냥해 오셨는데 거의 죽어가고 있었대. 그것을 본 한 여종이 아주 특이한 풀을 먹여 그 꿩을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그 꿩을 아주 잘 키워냈다는 거야. 그것을 본 수양대군께서 기뻐하시며 그 뒤 사냥할 때마다 꿩이며 토끼며 산 채로 잡아와서 그 여종에게 선물처럼 주셨대. 가슴 설레는 이야기지? 그 여종의 이름이 덕중인데, 당연히 덕중은 정성을 다해 그 생명들을 돌봤겠지. 수양대군께서 이를 예쁘게 보시고 덕중을 여자로 취하셨다잖아. 그리고 왕위에 오르시고 나서 궐 안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으셨다. 일약 정3품의 소용마마가 되신 것이지.
주상전하께서 총애하시면 중전마마가 투기를 하실 법도 한데, 중전마마도 소용마마를 아끼시고 자주 불러들여 말동무를 하신다고 들었다. 그분을 만나보면 왜 그런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언젠가 궐 밖에서는 겨울에 채소를 재배할 수가 없어 먹을 야채가 별로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시금치나 고수, 김장배추를 다 뽑아버리지 말고 낙엽을 두툼하게 덮어두라고 하셨다. 일러준 대로 해봤더니, 정말 한겨울에도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잠녀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주상전하나 중전마마를 얼마나 극진히 모시겠느냐. 조금 특이한 면이 있으시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여러 가지 신기한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 같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익으면 몰래 좀 가져다 드릴 생각이다. 뽕잎은 누에의 밥도 되지만, 열매인 오디는 아주 달콤한 즙을 머금고 있어 사람에게도 괜찮은 주전부리야. 소용마마 말씀으로는 오디가 상실 또는 상심이라고 하여 건조하여 한약재로 쓴다고 하시더라. 기침을 멈추게 하고 여러 질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말이야. 아 참, 옥지야 네가 달거리가 심하다고 했지. 다음에 소용마마를 뵙게 되면 달거리 고통에 좋은 풀이나 약초를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옥지야. 뽕밭이나 잠실에는 귀신이 없으니 걱정 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또 알려 줘.
동무 고아라가
1 조선왕조 세종대왕 5년 2월, 뽕나무 1,000주를 심게 하고 잠종을 주어 기르도록 하였다.
2 왕의 후궁의 직첩은 빈(정1품), 소의(정2품), 소용(정3품), 소원(정4품)과 귀인(종1품), 숙의(종2품), 숙용(종3품), 숙원(종4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