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회
김옥지가 고아라에게
1465년 6월 10일
아라, 보아라.
짐작했겠지만, 어둡고 축축한 잠실1 속에서 지옥 같은 밤을 보냈다. 놀라서, 잠실을 몇 번이나 뛰쳐나갔는지 몰라. 으아, 용의 꼬리가 요동치듯, 검푸른 하늘에 빛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급하게 뒤따라온 천둥이 사정없이 마른하늘을 깨뜨리며 달려들었다. 무섭고 외롭고 게다가 이제나저제나 누에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초조하기 그지없었지. 누에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뭐냐. 누에는 빛을 싫어해서 잠실은 낮이고 밤이고 빛을 차단시켜 놓아야 하고, 소리에 민감해서 양잠을 시작하면 민가에서는 옆집에서도 방아를 찧지 못하고 사람이 죽어도 곡소리도 내지 않는다. 한데, 밤새도록 빛이 하늘을 찢고 소리가 세상을 뒤집어 놓으려 하니, 누에와 내 앞날이 캄캄했었다.
누에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밤새 소란과 걱정으로 지친 탓에 앉은 자리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야. 놀라서 일어나니, 오! 아라야. 검은 판자와 홑청으로 사방팔방 빛을 막아놓은 잠실의 가는 창틈사이로 붉은 새벽 햇살이 실핏줄처럼 비쳐들고 있었어. 세상에! 그 가는 빛 입자 주변으로 막 깨어난 어마어마한 수의 개미누에2들이 꿈틀대고 있지 뭐냐. 누에들이 빛 주변으로 몰려있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어. 하기야 누에도 본래는 야생 뽕나무 잎을 먹는 해충이었으니 태어날 때부터 태양을 싫어하진 않았겠지. 비단실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마구 잡아 기르는 과정에서 빛과 소리와 냄새를 싫어하는 예민한 녀석들이 됐을 거야. 휴, 무사히 밤을 넘긴 셈이었지.
문제는 그 다음이야. 아라야, 십년감수 한 일이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오늘 새벽에 아무래도 내가 귀신을 본 듯하다. 누에들이 무사히 알에서 깨어나서 마음이 놓였지만 긴장과 피로로 반 혼수상태였다. 뽕잎을 따는 노자(奴子)3가 올 시각은 아직 멀었고 개미누에들은 신선한 뽕잎을 기다리고. 잠실 문을 열고 나갔지. 소란스럽던 지난밤은 온데간데없고, 투명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뽕나무들은 더 싱싱하게 더 풍성하게 연둣빛 잎사귀들을 하늘을 향해 한껏 뻗어 올리고 있었지. 천둥과 번개가 지나간 뒤엔 인간사도 그처럼 아름답기를! 아침 공기와 뽕나무 이가화(二家花)에 한순간 매혹되었다가 부랴부랴 뽕잎을 따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람이 스윽 지나가는 것이 보이지 뭐냐. 생각하면 지금도 손끝이 떨린다.
원유(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다 알진 못해도, 묘시에 잠실 부근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잠녀4 밖에 없잖아. 간밤에 천둥번개로 난리가 났으니 걱정이 되어서 네가 교대시간보다 일찍 나타난 줄 알았지. 반가운 마음에 “아라!”하고 크게 불렀더니 저쪽에서 스윽 고개를 돌리지 뭐야. 뽕잎들에 가려 몸은 보이지 않고 얼굴만 보였… 네가… 아니고… 갸름한 아주 고운 선을 지닌 여인 같았다. 헉, 두 손을 가슴 위에 감싸 쥐고 한동안 서 있었다. 다시 보니, 그 여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뽕나무를 쥐고 흔들었던 모양 손에는 뽕나무 꽃잎들이 쥐어뜯겨 있었다. 밤새 내가 너무 긴장하고 피곤해서 누조(?祖)5를 본 것일까, 헛것을 본 것일까? 얼마나 고달픈 수직을 했는지. 너는 지금쯤 입궐을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어제 어스름녁에 김 씨 형님6이 와서 중전마마께서 직접 뽕을 따고 누에를 치시는 친잠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만반의 차비를 하라고 특별히 당부를 하고 갔다. 알에서 누에가 나오면 싱싱한 뽕잎을 잘게 썰어 주고, 뽕잎에 허연 실처럼 붙어 있는 ‘이’가 있는지 살펴보고, 똥을 싼 누에는 새로운 잎 위에 올려주고, 잠실의 습도를 잘 유지하라고 뻔히 아는 이야기를 몇 번씩 되풀이하고 갔다. 그렇게 걱정되면 잠실을 좀 더 같이 지키면서 누에를 돌보는 편이 나을 텐데 말이야.
내 동무 아라야. 김 씨 형님에게서 들었는데 잠실을 감독할 새 환관7이 곧 온대. 창덕궁 잠실에서 경험을 쌓은 품관이라니, 위급한 상황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누에들이 알에서 나왔으니 잠녀들이나 뽕잎을 따줄 노자(奴子)들이 더 많이 들이닥칠 것이고, 오늘부터 잠녀들이 두 명씩 교대로 누에를 돌본다고 하니, 어젯밤처럼 혼자 애달아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둘이 같은 시간대에 일하면 좋을 텐데, 너는 해처럼 낮에 일하고, 나는 달처럼 밤에 일하니, 우리는 서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누에들 때문에 앞으로 점점 더 바빠지겠지만, 혹여 밤에 잠실에서 무섭거나 외로우면 또 너에게 서찰 쓸게.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낯설고 힘들었는데, 항상 의지가 되는 내 동무, 그럼 안녕!
너의 새 동무 옥지
1 조선시대 국립 양잠소로 뽕나무의 재배와 양잠 그리고 누에의 생산과 공납을 맡았다. 한양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내잠실, 연희궁의 서잠실, 악천정과 아차산의 동잠실이 있었으며, 세조 시절에는 약 334개의 잠실이 설치될 만큼 양잠에 대한 관심이 컸다.
2 갓 태어난 누에의 애벌레는 털이 많고 색이 검은 개미 같은 모습이어서, 개미누에라고 부른다.
3 뽕잎 따는 임무를 맡은 잠실의 노비로 적상노(摘桑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잠실에서 누에를 치는 여자로 잠모(蠶母)라고 부르기도 한다.
5 누조는 중국 황제의 부인으로 처음으로 잠업을 시작해서 누에의 여신이라 부르며, 선잠(先蠶)이라고도 한다.
6 궐 안에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선배를 김 씨 형님 이 씨 형님 등으로 불렀다.
7 흔히 환관을 내시라고 하는데, 본래 내시는 ‘궁궐 안에 사는 신하’라는 뜻이어서 환관제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일반 관료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반면 환관은 궁궐 안에 사는 거세한 남자를 일컫는 표현으로, 환자, 환수, 환시, 중환, 내환 혹은 엄인, 엄자, 엄수 엄시라고도 부른다, 환관은 왕명 전달, 궁중 음식 감독, 대궐문 경비,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지휘하고 감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