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백오장(百五張)이 백육장(百六張)에게
1466년 4월 18일
백육장, 소문 들었나. 궐내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어 영의정 신숙주가 물러났다. 스스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고들 하지만, 권력이란 일단 손에 쥐게 되면 놓기가 어려운 것인데,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가. 군왕께서는 구치관을 영의정으로 삼고, 황수신을 좌의정으로 삼고, 박원형을 우의정으로 삼으셨다. 신숙주는 고령군으로 명하셨을 뿐이다. 한때 신숙주가 영의정 자리를 믿고 구치관을 벌주려 한 적도 있는데, 이제 구치관이 영의정이 되었으니 신숙주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권력이란 달과 같아 찼다가 기울고 기울었다가 차기도 하는 법, 우리처럼 권력과 무관한 자들의 삶이 최고 경지가 아닌가.
이번 대대적인 물갈이 중에 김수경이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고 한다. 김수경이 누군가. 그는, 활을 쏘는 재주도 없고 말을 잘 달리는 재주도 없고 계획을 잘하는 머리 반듯한 인간도 아닌데, 그런 벼슬을 하게 된 연유가 무엇이겠나. 오로지 신미(信眉) 대사의 아우라는 이유뿐이다. 김수경은 법명도 없이 속세의 이름만 가지고 중 행세를 하던 땡추가 아닌가. 하, 김수경이 사헌부 장령이면 나는 영의정일세. 도대체, 이 무슨 모양새인가. 백팔장 모임을 만들 때는 중들을 벼슬자리에 내보내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부처의 뜻을 널리 펴고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커진 불교의 힘을 빌려 권력을 취하려 하다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신미는 첫째 동생인 김수경뿐만 아니라,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 편찬 작업에 참여한 나름 의식 있는 문장가이자 둘째 동생인 김수온에게도 높은 벼슬을 내리게 하려고 작업 중이라 한다. 셋째 동생, 심지어 조카들의 벼슬까지 꿈꾸고 있다한다. 신미가 그러할진대, 다른 대사들이나 승려들이 어떻게 권력에 눈독을 들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백팔장 모임을 만든 본뜻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과거 고려시대 불교가 누렸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속세의 권력에 눈멀어 우리의 큰 뜻이 길을 잃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자네가 승려 백팔장의 짝패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알기로 그의 짝패는 없다. 백일장과 백이장, 백삼장과 백사장, 백오장인 나와 백육장인 자네, 백장과 백칠장이 모두 짝패이다. 짝패가 없는 이는 오로지 백팔장뿐이다. 물론 승려 덕중의 짝패는 여종 덕중이었고, 승려 만유의 짝패는 안평대군이었다. 백팔장 안에서만, 승려들끼리만 짝패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속세의 사람들도 짝패로 삼았다. 각자의 임무에 따라 그 짝패가 정해졌는데, 당사자들은 짝패인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승려 덕중은 여종 덕중과 짝패인 것을 알았겠지만, 여종 덕중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두 덕중이 짝패가 된 과정도 소용 박 씨가 죽어가면서 백팔 글자라고 천명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수양대군에게 전한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백성의 소리를 부처에 바쳐야 하는데, 그때 나랏님의 뜻을 적은 훈민정음 어지 서문이 불교의 신성수인 108글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임금은 이미 승하하셨는데, 그가 적어놓은 어지 54자를 그 두 배인 108글자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은 임금을 다시 살려내어 어지를 다시 쓰게 만들어야 할 만큼 어려운 신탁의 조건이었다.
(한문본)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
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54자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낸 것이 바로 여종 덕중이었다. 언문 쓰기를 좋아하는 여종 덕중을 보시고 수양대군께서 세종대왕의 어지 서문이 54자인데, 108자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소용 덕중이 그 자리에서 해답을 말했다고 한다. 훈민정음 원본이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언문으로 108자로 번역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훈민정음 언해본 어지 서문 108자였다. 이 이야기를 백팔장은 수양대군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자 백팔장이 지금의 승려 덕중에게 그 여종과 똑같은 법명을 내리고, 수양대군 댁에 드나들면서 소용 덕중과 친해지도록 한 것이다. 백팔장이 두 덕중 사이에서 어떤 일을 꾸몄는지는, 나도 자네도 그리고 심지어 두 덕중도 알지 못한다.
소용 박 씨가 죽어가면서 나름 큰 비밀을 폭로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용 박 씨는 수양대군이 왜 108자로 바꾸려고 했는지 궁금했을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린 왕을 죽이고 수양대군이 왕을 차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그것보다 휠씬 크고 무서운 것이었다.
백장, 백일장, 백삼장, 백육장, 백칠장, 모두 회합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나도 찬성이다. 백육장의 뜻을 알려주기 바란다.
백오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