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상당 부원군 한명회가 하동 부원군 정인지에게
1466년 4월 5일
부원군 대감,
주상전하께서 워낙 공신들을 아끼셨기에 이번 사건은 나로써도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네. 하지만 대감께서도, 다른 공신들처럼, 주상전하께서 약속을 깨셨다고 믿으시는가. ‘죄를 지어도 영원히 용서한다’는 약속을 해놓으시고도 양정의 목을 벤 것은, 왕 스스로 어명의 절대성을 훼손한 일이라며 공신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말일세. 주상전하께서 약속하신 ‘죄’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른 모든 것들에 해당될지는 몰라도, 임금께 지은 죄까지 무화시킨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공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용서하란 말인가. 양정은 왕에게 왕좌에서 물러나 쉬라는 뜻을 펼쳤으니, 역모의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주상전하의 진심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양정이 그러지는 못했을 걸세. 부왕인 세종 임금, 형님인 문종 임금, 그리고 지금의 주상전하, 지속해서 임금님들을 괴롭혀온 끔찍한 피부병을 알고 계시지 않는가. 술을 마시면 등에 실린 고름이 더 심해지리라는 전의의 간곡한 만류를 들으시고도, 술자리를 마련하신 것이었네. 고름만 있으랴, 등에는 종기의 딱지와 상처가 뜨거운 불길처럼 주상전하를 할퀴고 있다고 들었네. 그럼에도 왕손의 탄생을 기뻐하고 변방에서 온 양정을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술을 드신 주상전하가 아니신가. 나만 해도 딸년은 죽고 뒤를 이은 세자빈이 낳은 왕손을 축하하는 술자리였으니, 누구는 마음이 편해서 술을 마셨겠는가.
하동 부원군 대감, 주상전하를 좀 이해해 주시게. 요즘 부원군 대감께서는 몸이 불편하다시며 입궐을 기피하시고 계시고, 신숙주는 영의정 자리를 내놓겠다고 버티고, 다들 무슨 심사인지… 주상전하의 심정이 오죽하시겠는가. 사랑했던 소용 박 씨가 조카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내는 참으로 망극한 일을 당하지 않으셨나. 사랑하는 여자를 처형하고, 조카 귀성군을 살릴 수밖에 없는 왕의 갈등과 번민이 얼마나 컸겠는가. 사랑보다는 형제의 우애를 선택한 것은 또다시 다른 조카와 악연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다보니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두 번 잃게 되었지. 소용 박 씨가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냄으로써 한번 잃고, 자신이 소용 박 씨를 처형함으로써 다시 잃게 된 셈이네. 그 끔찍한 괴로움을 잊기 위한 마련한 술자리에서 대감은 소용 박 씨의 백팔 글자를 들고 나왔고, 킁. 어디 그 뿐인가. 이번에는 축복처럼 태어나신 왕손을 보신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양정은 찬물을 끼얹었네. 이 어찌 제대로 된 군신의 관계라 하겠는가.
백성들은 또 어떤가. 새 왕손을 보신 뒤인데 그런 잔인한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고들 한다네. 소용 박 씨의 죽음에 대한 응보라는 소문도 또 되풀이 되고. 킁, 소용 박 씨와 양정 중에 누가 왕의 편이고 누가 형제의 편이냐고, 또 편 가르기를 하면서 말일세. 백성들은 왕과 형제 사이를 끊임없이 갈라놓으려 하지 않나. 그것이 주상전하의 불안감의 이유이고, 또 주상전하께서 귀성군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이유일세. 그래서 말인데, 대감, 이 암울한 분위기와 망극한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책을 찾아보지 않겠나. 여자로 인해 다친 마음은 여자를 통해서만 치유할 수 있다며, 왕께 후궁을 새로 들이라고 주청을 넣어보자는 이도 있지만, 대감도 아시다시피 주상전하께서는 예전부터 색을 좋아하지 않으셨네. 기생에 대해서 관심은커녕,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화장을 두껍게 하니 인간 족속이 아니라고 예전에 언급하신 적이 있으니, 여인으로 상심한 성심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네.
지금 주상전하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왕손을 많이 안겨드리는 일이네. 킁, 그래서 하는 말인데, 돌아가신 의경세자는 두 명의 왕자를 남겨 놓지 않으셨나. 중전마마께서 첫 왕자인 월산군을 곧 박중선의 딸과 혼례를 올리게 하실 모양이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많이, 왕손을 보고 싶으신 중전마마의 조치라고 하지만, 아마 주상전하의 심기를 바로잡기 위한 중전마마의 극단적인 결정이 아니겠는가. 가을에 월산군의 혼례를 올리실 것으로 결정이 난 모양이어서, 친잠례가 끝나면 바로 준비가 시작될 것이네.
그런데 대감, 월산군이 혼례를 올리고 나면 둘째 왕자인 자을산군1이 남게 되네. 자을산군의 배필로 적당한 처자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킁, 나에게 어린 딸이 아직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네. 자을산군과 내 딸년을 맺어주면 어떨까 해서 부원군에게 상의 드리네. 월산군의 혼례가 끝나면, 중전마마께서 자을산군의 배필 찾는 일을 바로 하실 것이네. 자네는 주상전하의 외동딸 의숙공주를 며느리로 삼아 사돈지간이 되니, 의숙공주를 통해 이런 뜻을 한번 궐에 전해보면 어떻겠는가. 대감의 뜻이라고 하면 의숙공주마마께서 더 잘 중전마마께 말씀드릴 것이 아니겠는가. 대감은 아들을 가진 덕으로 아무 탈 없이 주상전하와 사돈지간을 계속 이어가지만, 나는 딸을 가진 죄로 계속 마음을 졸이며 주상전하와 사돈지간을 맺어왔네.
물론 해양세자의 첫 세자빈이었던 내 첫 딸은 몸이 약했지. 인성대군을 낳자마자 가버리고 인성대군도…. 그래서 나만은 주상전하의 지금 심정을 이해할 수 있네. 주상전하께서는 의경세자도 잃고, 인성대군도 잃고…소용 박 씨도…양정도 잃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니, 또 죽여야 하니! 대감께서 주상전하를 바로 모신다는 충정으로 이번에 나를 한번 도와주게. 주상전하의 웃음을 되찾아 드리세. 딸년이 총명하고 마음이 다정하니, 이 복잡한 왕실과 종실을 어지럽히지 않는 좋은 짝이 될 걸세. 의숙공주를 통해 분위기를 몰아주거나 주상전하께 잘 말씀드려, 자을산군과 내 딸년을 맺어주면, 대감, 그 은혜 잊지 않도록 하겠네.
제발 한번 만나 주상전하를 바로 모실 중지를 모으도록 하세나. 대감, 나를 좀 도와주게.
한명회 배상
1 세조를 이어,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지만 10개월 만에 죽고 만다. 정희황후의 선택에 따라 의경세자인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제8대 왕 성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