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환관 방비리가 잠녀 고아라에게
1466년 3월 30일
자네가 여러 번 나에게 서찰을 보냈지만, 여태 답장을 하지 못했네. 소용 박 씨의 서찰 한통으로 여러 명 목숨을 잃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되도록 서찰을 삼가고, 드물게 단둘이 있게 되는 시간에 소용 박 씨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자네가 소용 박 씨 서찰 한 통을 가슴에 품고 조마조마한 심정을 견딘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 서찰을 뜯어보면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생각마저 든다네.
쓰지 않아야 하는 서찰을 쓰게 된 이유는, 으음, 상황이 조금 급박하네. 아무래도 자네와 무관치 않은 일 같아서 말일세. 누군지 알 걸세, 주상전하의 차를 담당하고 가끔 나를 보러오는 강 상차가 우연히 무엇을 본 모양이네. 그가 나에게, 작년에 원유의 뽕밭에서 잠녀가 뽕잎에 바늘구멍을 내던 것을 보았고, 몰래 잎을 따다가 새겨진 글자를 확인한 후, 전 상선에게 가져다 받쳤다고 고백해왔네. 소용 박 씨가 무엇이 급해서 목숨을 걸고 귀성군에게 서찰을 보냈을까 하고 혀를 찼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나 역시 목숨을 걸고 자네에게 서찰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네. 그 이유는… 우선… 뽕잎에 구멍을 내던 잠녀가 바로 자네 아닌가. 자네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네. 수년 전 경복궁에서 쫓겨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혼란과 걱정이 나를 휩싸고 돌았네. 자네가… 다칠까봐…. 으음.
상차가 건넨 뽕잎을 전 상선이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네. 전 상선은 주상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들의 수장으로 하찮은 뽕잎 하나에 신경 쓰시지 않았으리라 여겨지지만, 혹여 잎에 적힌 글자의 의미를 풀어냈다면 그냥 넘길 분은 아니네. 몇 번의 정난과 역모를 거치면서 많은 환관들이 귀양을 가고 목숨을 잃어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승승장구한 분이니, 전 상선의 처세술과 판단력은 보통 사람을 넘어서니 하는 말일세. 그 나뭇잎을 어떻게 했는지, 해가 넘어가도록 아무런 말이 없으니 별일 없이 넘어갈 것이라 여겨지지만, 아 그러고 보니, 최근 천 상선이 나를 한번 찾아왔으면 한다는 말을 김 상선을 통해 들었는데, … 관련이 없기를 바랄 뿐이네.
상차가 그 뽕잎을 전 상선에게 건넨 이유는 내가 누에와 비단의 양을 비교조사 하는 등 트집을 잡는 것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네. 혹여 내가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것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일세.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잠녀 옥지와 자네처럼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무슨 친구 사이가 그러냐고 묻을 것이네. 그렇잖은가? 그렇게 서로 못 믿으면서 무슨 친구냐고. 하지만 서로를 아껴도 주변의 권력이나 힘이 우정과 함께 휘돌 때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다네. 세상을 순수하게만 보는 자네에게 그런 복잡한 상황이나 감정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상차나 나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원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네.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친구가 분명하이. 나보다 도리어 원종이 그 친구가 더 나를 아낀다고도 할 수 있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성격인데다가 원칙을 지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친구라 하여 덮어주거나 감싸주지 않는다네. 상차가 뽕잎을 가져다가 전 상선에게 준 것은 나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라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방어를 하기 위해서였다니,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이 서찰을 쓰다 보니, 방어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왜 하필 전 상선에게 갖다 바쳤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구먼. 혹시 전 상선과 상차가… 같이… 으음.
그건 그렇고, 뽕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그 싹이 늦게 돋아 5월 말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 뽕나무에 다시 꽃이 피면, 소용마마의 서찰을 받을 자가 다시 나타날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네. 원유의 천 그루 뽕나무들 중의 하나가 분명하다면, 또 한번 시도해보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지 않겠나. 더구나 원유 안에서 일어날 일이라면 그 자도 분명 궐 안에 있는 자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적어도 원유를 드나드는 허락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자이거나, 아니면 특정한 날 원유에 들어올 수 있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궐 밖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나. 중전마마의 친잠례 때, 궐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어 들어오지 않았나. 소용 박 씨가 죽어간 날이 친잠례 날이었던 것, 기억하는가. 작년 친잠례에 참석했던 외부인들 중에 그 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간에서 상차가 뽕잎을 가로채는 바람에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네.
이번 봄 양잠을 끝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네. 작년에는 소용 박 씨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상전하께서 친잠례에 참석하시지를 못하셨고, 누에의 여신(서능씨)에게 제향하는 의식인 잠령제1도 생략하지 않았나. 잠령제를 위해 주상전하께서 곧 집행관을 임명하시게 될 걸세. 작년에는 중전마마께서 뽕잎을 따는 의식인 친잠의와 친잠을 마치고 내외명부들의 하례를 받는 조견의만 했지. 올해는 먼저 잠령제를 지내고, 친잠의와 조견의를 한 후, 누에고치를 거두는 수견의와 조정대신들에게 누에를 나누어주는 반견의까지 하실 예정이네.
그러니 올 양잠에는 작년보다 할 일이 많네. 잠동 별로 양잠 시작 시기를 조절하고 조금씩 차별을 두어서, 주상전하와 왕후마마 그리고 대신들과 내외명부가 한 과정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잠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네. 누에가 고치짓기를 시작하는 시기부터 해서 3일쯤 지나면 고치가 거의 완성되지 않는가. 고치를 짓기 시작한지 약 1주일 정도가 되면 누에는 번데기가 되고, 다시 1주일 정도가 더 지나면 나방이로 탈바꿈하게 되지. 작년에는 이때부터 잠녀들의 참가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올해부터는 잠녀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할 수 있도록 중전마마께 허락을 받았다네. 입에서 진득한 액을 토해내어, 고치를 뚫고, 이른 아침에 나방이가 나오게 되는데, 몸은 젖어 있고 날개도 접혀진 상태이지만 물기가 마르면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네. 나방이의 암컷은 몸 안에 많은 알을 갖고 있어 수컷보다 크고 뚱뚱한 편이고, 암컷의 향기를 맡고 온 수컷은… 으음.
이번 양잠을 통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중에, 첫 번째 문제는 내가 맡겠네. 다시 말해 이번 양잠의 전 과정을 통해 누에가 어떤 경로로 빠져 나갔는지 반드시 알아낼 것이네. 둘째는 자네가 맡아주어야겠네. 소용 박 씨의 마지막 서찰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 궐 밖에서 들어오는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일세. 목록을 만들어 놓았다가 차후에라도 접촉할 자가 있는지도 검토해 보게나. 물론 이 모든 것은 은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어야만 할 것이네.
뽕나무 새싹이 돋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이해하겠는가? 이는 단순히 잠실을 맡은 관리의 심정이 아니라, 서찰을 품고 전할 자를 기다리는 자네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네. 완연한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마음이랄까. 이렇게 서찰을 쓰고 보니, 급했던 것은 내 마음이었고, 상황이 다른 때보다 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네.
아무쪼록 몸조심하시게.
잠실 방비리 씀
1 사람들에게 비단과 건강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을 못다 한 채 죽어가야 하는 수많은 누에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