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잠녀 김옥지가 잠녀 고아라에게
잠녀 김옥지가 잠녀 고아라에게
1466년 3월 26일
아라야, 오! 아라야! 이게 얼마만이냐. 어제 궐에 들어갔다 왔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두 달 후부터 본격적으로 양잠이 시작 되잖냐. 이번 봄 양잠에 참여할 잠녀들의 잠실 집합 시간이 진시(辰時)였거든. 너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서 입궐했으니 묘시(卯時)가 조금 지났을 거다. 당연히 너는 없지. 내가 일찍 온다는 것을 알 턱이 없으니까. 네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들뜬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별로 할일이 없더라고. 그래서 세종대왕님이 심어놓은 천 그루 뽕나무 사이를 거닐기 시작했지.
저, 아라야. 사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안 하려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확 말해 버리려고 한다.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 아니? 짐작했겠지만, 한 달에 한 번 내가 까무러치는 날이었다. 에휴, 지겨워라, 달거리! 가슴의 멍울이 빳빳하게 긴장되어 자꾸 옷가지와 스쳤기 때문에 몸도 예민해져 있었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리 곤두박질을 치고 까닭 없이 수줍고 소심해지고 하더니, 급기야 아랫배까지 살살 아파오더란 말이지. 그래서 뽕나무 밭 끝의 납작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어. 통증 때문에 아랫배를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
엥? 내 앞에 신발이 보이더란 말이지. 얼마나 놀랐겠냐. 움찔 고개를 드니, 그쪽에서도 놀란 모양 소스라치더라고. 그런데 휴, 누구였는지 아니? 그 사람은, 강원종 상차 어른이었어. 글쎄 예쁘장한 환관 있잖아. 왜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작년에 잠녀들에게 차를 가져왔던, 아!, 손이 하얗고 부드럽던, 목소리까지 가늘어서 귀를 간질이던 상차 어른 말이지. 함자가 강, 원, 종. 그도 나를 알아보는 눈빛이지 뭐냐. 그런데…
서로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야단이 났어. 화들짝 놀랄 일이 있었는데, 내 가슴 한쪽이 갑자기 바늘에 찔린 듯 아팠거든. 따끔거리기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 어이없이 소리까지 질렀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지 뭐냐. 할 수 없이 저고리 안을 들여다보았지. 그 안에 큰 집게벌레가 내 살을 물어뜯고 있는 거야. 놀라서 질겁했지. 정신없이 고름을 풀고 집게벌레를 찾았지. 아파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였다니까. 그때 상차 어른이 내 가슴께에 있던 집게벌레를 집어 저 멀리 던져버리지 뭐냐. 물린 가슴께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 맙소사, 정신을 차리니… 다른 사람 앞에서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있었던 거야. 앞에 남자 환관이 있다는 것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거야. 서둘러 옷고름을 매려고 해도, 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지 뭐냐. 내가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해하자,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서둘러 가버리더라구.
사실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얼마나 망설였는지 아냐? 너는 내 성질 잘 알잖아. 마음에 혼자 담아두지 못해서 너에게 죄다 불어버리고 말잖냐. 상차 어른이 내 벗은 어깨를… 아라야! 이상한 것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동무인 네 앞에서 벗은 것처럼, 아니 네 앞에서도 조금은 부끄러워했을 텐데, 그 사람 앞에서 옷고름을 풀어헤쳤는데도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았어. 도리어 향기 좋은 나무에 기대앉을 때의 기분처럼, 느긋하고 뿌듯한 이런 요상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를 남자로 느끼느냐고 묻겠지만, 천만에! 남자로 느꼈다면 부끄럽지 않았겠냐. 더구나 상차 어른은 환관이 아니냐. 뭐랄까, 내가 내 앞에서 벗은 느낌이랄까. 내가 나를 본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달거리 진통 때문에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거나 아, 이 이상한 감정이 뭘까.
오! 아라야. 어쩌면 좋으냐, 아니 얼마나 좋으냐, 어쩌면 올 양잠에서는 너와 내가 같은 조로 일하게 될지도 몰라. 잠녀들이 모두 모였을 때 너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비리 나리가 잠녀들의 출석을 확인했는데, 네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올해 봄 양잠에 참여하지 않는 것일까, 작년부터 잠실 일을 계속 돌보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속으로 나름 걱정을 하고 있었지. 보는 눈들이 많아서 방비리 나리에게 물어볼 수도 없더란 말이지. 그런데 그가 우리 둘이 같이 일하게 될 거라고 알려주지 뭐냐. 너는 말뚝 잠녀로 계속 궐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호출에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 작년에는 네가 낮에 나는 밤에 일했지만, 올해는 낮에 같이 일하거나 밤에 같이 일하게 될 거래. 아무래도 방비리 나리가 배려해준 것 같아.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이 올곧고 사람들을 은근히 잘 돌봐주잖아. 어쩌면 너를 도와주려고 나를 붙여 주었는지도 모르지. 너는 아니라고 우기지만 분명 방비리 나리는 너에게 관심이 있어. 너도 아마 그럴 걸. 너는 계속 아니라고만 하니, 사실 조금 섭섭하지 뭐냐. 나는 소견머리가 없다고 할 만큼 죄다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너는 감출 것 감추고 숨길 것 다 숨기고 꼭 필요한 말만 한다. 어째 친구 사이라 해도 공평치 않어. 그래도 나는 네가 좋으니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호출이 끝나고, 비어 있는 어두컴컴한 잠실에 들어가 잠녀들이랑 조금 시시덕거릴 시간이 있었어. 그런데 아라야, 글쎄, 잠녀들이 깜짝 놀랄 수다들을 떨더라니까. 마을에서는 보통 정분난 남녀가 방앗간에서 통(通)을 한다고들 하지 않냐. 그런데 이 욕쟁이 잠녀들의 말로는 궐 안에서 정분이 나면 이 잠실이 딱 제격이라는 거야. 원유는 금원이니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고, 더구나 뽕나무가 끝도 보이지 않게 심겨져 있으니 숨바꼭질하기 딱이고, 잠실은 어두컴컴하고 분위기도 좋아서 정분을 나눌 수 있는 최상의 장소래. 입들이 걸쭉하더라니까. 환관과 궁녀가 몰래 잠실에 숨어들기도 한다는 거야. 물론 농담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잠실이 갑자기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까지 들더라니까.
마지막으로 아라야! 응, 이것까지 말하면 내가 배알 없는 년으로 보일 텐데, 하지만 어쩌겠냐. 어제 궐에서 돌아와서 밤에 잠을 자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더란 말이지. 내가 금원 뽕나무들 안으로 강원종 나리와 함께 몰래 들어가는 거야. 내 저고리 섶이 벌어져 있고, 그가 내 앞가슴을 만지더라니까. 민망해서 손길을 거절했더니, 갑자기 장소가 달라져 확 뚫린 근정전 같은 곳이 나왔어. 강원종 나리가 큰 기둥에 나를 기대 세운 뒤 앞에서 가로막아 꼼짝 못하게 해놓고, 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만지고 그런 행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기분이 뒤숭숭… 뭐랄까. 한데. 그때 사람들이 다시 금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놀란 그가 순식간에 내 곁에서 사라져가더란 말이지. 아, 달콤하면서도 꺼림칙한 꿈이었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꿈 해몽을 할 줄 아는 사람 없을까?
아, 아라야! 봄이다. 민들레는 머리에 깃털을 달고 하늘에서 바람을 붕붕 타고 있다. 녹색 개구리와 새순들도 땅에서 쑥쑥 솟아오르고 있다. 아!, 소나무는 바위를 뚫고, 새는 둥지에서 하얀 알을 낳는다. 우리는 어떻게 하냐?
네 동무 옥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