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보명상궁이 정희왕후에게
보명상궁이 정희왕후에게
1466년 3월 1일
중전마마, 중전마마를 모시게 된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귀성군의 동태를 감시해왔습니다. 동태를 살피라고 붙여 놓은 ‘눈사람’에 따르면, 지난 번 잠저에 들린 후, 귀성군은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합니다. 알아본 바로는 그동안 마음의 병을 얻어 집안에서만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상전하의 명을 받고 귀성군이 입궐하였습니다. 점점 건강이 나빠져 산에 요양을 가려던 차에, 주상전하의 입궐 어명을 전달받은 모양입니다. 귀성군이 임영대군에게 인사도 없이 산으로 몰래 떠나려 한 것을 잡아왔다는 말도 있지만, 정황상으로 보나 귀성군의 성격으로 볼 때, 그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주상전하와 귀성군이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전에서 나가는 귀성군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몸이 많이 아픈 상태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전마마, 혹여 소용 박 씨의 서찰과 관련하여 임영대군과 귀성군의 태도가 조금 수상하지 않은지요? 생각해보면, 임영대군이 귀성군과 함께 소용 박 씨의 연서를 들고 주상전하를 찾아왔던 것부터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아들이 그런 연서를 받았다면, 그 연서를 없애거나 쉬쉬 입막음을 하고, 소용 박 씨에게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당부했을 것입니다. 서찰을 들고 들어와서 주상전하께 보여드리게 되면, 궐 안이 발칵 뒤집힐 것임을 임영대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아들 귀성군의 생명과 명예가 달린 문제입니다.
게다가 궐에서 나간 후, 귀성군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귀성군은 처음에 용우사 쪽으로 갔습니다. 산에 요양을 하기 위해서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표운사로 갔습니다. 월경사, 점유사, 양정사, 차례차례 다니고 있습니다.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거나 그곳에서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사람’이 이리 묻고 저리 물어 알아낸 바로는, 귀성군이 승려 덕중을 찾고 있는 듯하다고 합니다. 주상전하를 뵌 뒤 일어난 변화이니, 짐작컨대 주상전하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상전하께서 직접 승지에게 하명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귀성군에게 시켜서 찾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전마마, 이처럼 주상전하와 임영대군과 귀성군 사이의 묘한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다가, 쇤네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6~7년 전쯤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의경세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중전마마께서는 해양세자의 건강과 안위에 대해 지극히 마음을 쓰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해양세자가 서책만 읽고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해 염려하시면서, 궐 안쪽, 원유에서 왕자들의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사냥대회를 열어 달라고 주상전하께 청을 드리신 일, 기억나시는지요. 비록 금원이기는 하나, 주상전하의 허락이 있으면, 사냥대회도 하고 과거 시험도 치고 때로 종친들과 술자리도 마련할 수 있는 곳이 원유가 아닙니까. 더구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초봄이라 양잠을 하는 시기도 아니어서, 잠실 주변이 소란해도 무방한 때였습니다.
마침내 사냥대회가 열렸는데, 활과 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맨손으로 풀어놓은 토끼를 잡는 놀이였습니다. 대회 목적이 토끼가 아니라, 해양세자와 다른 왕자군들의 몸을 움직이게 해주기 위한 것이니 좋은 방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양세자 뿐만 아니라 근빈 박 씨의 어린 왕자들, 그리고 귀성군을 비롯한 종친의 자녀들도 참석한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소용 박 씨의 아지 왕자군은… 태어나지도, 아니 생기지도 않았을 때일 것입니다. 당시 중전마마도 소용 박 씨와 함께 왕자들이 토끼를 잡으려 드넓은 원유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상전하께서는 토끼를 잡는 왕자나 왕자군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중전마마, 기억나시는지요? 당시 중전마마께서 저에게 은밀히 명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왕자들 앞에서 풀어놓을 토끼 한 마리 외에도, 다른 토끼 한 마리를 대회 전날, 비어 있는 잠실에 몰래 넣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중전마마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사냥은 아침부터 시작되어서, 야외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내내 지속되었기에, 중전마마와 근빈 박 씨는 돌아와 오후에 침실에서 쉬셨고, 소용 박 씨는 워낙 원유를 좋아하던 터라, 그 날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해가 뉘엿뉘엿 져서, 더 이상 토끼가 보이지 않을 무렵에야 사냥대회는 끝이 났습니다. 토끼를 손에 쥐고 나타난 것은 귀성군이었고, 주상전하께서는 귀성군에게 큰 상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마마, 귀성군이 잡은 토끼는 주상전하께서 사람들 앞에서 풀어놓으신 토끼가 아니라, 제가 빈 잠실에 가두어놓은 토끼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두 토끼의 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귀성군이 잡은 토끼가 주상전하의 토끼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해양세자가 그 토끼를 잡아 종친들이나 대신들 앞에 늠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할 생각으로 중전마마께서 준비한 토끼라고 여겼으나, 결국 토끼를 잡고 상을 탄 것은 귀성군이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다른 숨은 뜻이 있으셨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중전마마, 마침 잠저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귀성군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승려 덕중이 잠저를 찾아 왔었다고 합니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까지 길게 길러 묶은 터라,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깊은 눈빛이 예전 그대로 승려 덕중이었다고 합니다. 소인이야 아씨가 수양대군 댁으로 시집갈 때 따라 가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수양대군 댁을 자주 드나들던 덕중을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 말씀드릴 처지는 아닙니다. 지나가다 옛 생각이 나서 들렀다며, 그는 과거 그 댁에 옮겨 놓은 야생초들이 잘 자라는지 보고 가겠다고 했답니다. 그는 ‘덕중의 정원’에 들러 한동안 그곳의 나무며 풀이며 꽃들을 넋을 잃은 듯 들여다보고 갔다고 합니다.
중전마마,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상전하를 뵌 직후, 귀성군은 절마다 다니며 승려 덕중을 찾아다니고, 절에 머물러야 하는 승려 덕중은 잠저에 들러 꽃구경을 하고 갔습니다. 혹여 승려 덕중도 귀성군을 만나러 하산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서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서로 만나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서로 피하면서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명쾌하지 못한 글을 올려 황송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전마마! 세자빈께서 왕손을 생산하셨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의경세자께서 돌아가신 것이 어린 왕, 아니 노산군을 죽인 응보라고 하는 그런 헛소문에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좋을 줄 압니다. 의경세자와 노산군이 같은 해에 명을 달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노산군을 죽여서 의경세자가 그 응보로 죽었다는 소문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날짜를 정확하게 따져보면, 의경세자 가신 지 한 달이나 지나서 노산군이 사사되지 않았습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백성들이, 그저 같은 해에 일어난 것을 빌미삼아, 그렇게 떠들어댄 것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해양세자의 첫 세자빈이 죽은 것이나 그 아기씨인 인성대군이 죽을 때도 문종 임금의 부마와 아지 왕자군을 들먹이며 인과에 응보를 당한 것이라고들 했습니다. 더구나 작년에는 소용 박 씨를 처형한 것 때문에, 그 누군가가 해가 지나가기 전에 죽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소문과 달리 해가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건강한 아기씨가 탄생하셨습니다. 지난 해 소용 박 씨의 죽음에 대해 새해 양정의 죽음을 그 응보라고 끌어들이는 자들까지 있지만, 그것은 이미 신빙성을 잃은 것입니다. 새해, 새로운 기운을 받고 탄생하신 왕손에게 누가 감히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겠습니까. 중전마마, 이제 밝게 웃으실 때입니다. 중전마마의 그 환하신 미소로 주변의 걱정 근심을 물리치실 때입니다. 중전마마, 새 손자를 얻으신 것에 감축 또 감축드리옵니다.
보명상궁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