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화공 안견이 영의정 신숙주에게
화공 안견이 영의정 신숙주에게
1466년 3월 1일
대감, 주상전하께서 찾아오라고 하신 몽유도원도의 행방을 해가 바뀌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미천한 소인의 생각으로는, 대감과 함께 옛 안평대군의 별장을 돌아보았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대감께서 샅샅이 살펴보셨겠지만, 인간의 눈이란! 때로 멀쩡히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소인은 안평대군 댁에서 반평생을 보낸 사람이니… 그 별장의 구조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아는 편입니다. 숨어 있는 빈틈들이 있으니, 그런 곳들을 뒤져보면 어떨까요?
며칠 전에는 혹여나 해서 무계동까지 다녀왔습니다. 뭐, 그곳에 그림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답답한 심정에 무심코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낮게 깔린 잿빛 하늘 아래, 좁은 계곡을 따라 들어가니, 붉은 황토빛 넓은 들판에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꽃분홍빛 물결과 벌떼들이 잉잉거리던 그곳은, 이제 인적이 끊기고 더는 발길을 하지 않아 버려진 땅이 되어 있었습니다. 무계정사라는 현판을 달았던 정자는 아예 철거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자가 섰던 너른 바위에는 새들의 배설물이 켜켜이 쌓여 있고… 계절 탓이었을까요? 간담이 오싹할 만큼 서늘한 기운이 살 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냇가에는 습기로 썩어 가는 빈 배만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고 있어, 신음 같은 한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아! 왕이 나올 땅이라고 했던 바로 그 흥룡지지(興龍之地)가!
대감, 혼자 그곳을 거닐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몽유도원도나 안평대군이 아닌, 바로 저에 대해, 화공의 본분에 대해 말입니다. 흔히들 소인이 이 한 몸 안위를 위해 안평대군 곁을 떠났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굶고 밤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더라도,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지론이었습니다. 숙식과 보호의 대가로 그림을 그리는 화공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나 하실런지요. 대감은 한번이라도 밥과 잠자리의 대가로 시를 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흔히 몸을 파는 계집을 창기라 얕보지만, 밥을 위해 권력 곁에 붙어서 영혼의 그림을 파는 남정네가 어찌 창기보다 낫다할 수 있겠습니까. 심장과 쓸개를 빼놓지 않으면, 못할 짓입니다. 그럼 왜 안평대군 곁에 머물렀느냐고 책망하시겠지요. 아픈 노모의 생계를 위해서였습니다. 노모가 돌아가시면, 더 이상 부양할 가족이 없으면, 그 즉시 자유롭게 떠돌면서 그림을 그릴 생각으로, 꾹꾹 참으며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하기야 이것도 하나의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유야 어떠하건 제 손에서 태어난 그림은 제 그림입니다. 쓸개를 빼놓고 그렸건, 밥을 위해서 그렸건, 명예를 탐하여 그렸건. 하지만 소인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그림은,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파기해 버렸다면 몰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 그림이지만 더 이상 제 그림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림이 파기 되었다 해도 이미 누군가 그림을 보았다면,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 그림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몽유도원도가 어딘가에 존재하건 이미 파기되었건, 저에게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꼭 찾으려는 이유는 주상전하의 하명 때문이 아니라, 화공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몽유도원도만은 달랐습니다. 안평대군께서 소인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해주실 때, 처음으로 안평대군이 돈이나 밥으로 소인을 부리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화공으로써 소인을 인정하고 부탁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본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갈망을, 꿈과 그림 사이를 헤매는 한 인간의 낭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랑삼기 위해서나, 돈을 부풀려 팔기 위해서나, 술자리의 취기를 돋우기 위한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 바로 제 그림을 원했던 것입니다.
안평대군의 명, 아니 청을 받고 기쁘게 그린 유일한 그림이 몽유도원도입니다. 물론 그때 그것으로 끝났으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것입니다. 안평대군께서, 3년 뒤 별장 치지정에서, 그 그림을 펼쳐놓고 학사들과 문사들에게 자랑을 하고 찬시를 붙이지만 않았어도… 소인이 안평대군 곁을 떠나야겠다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힌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다행히 현왕께서도 그림을 좋아하셔서 소인은 목숨을 건지고 명예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내심 소인을 변절자라고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대감께서는 이런 의심을 받는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대감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밀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대감, 별장을 별로 즐겨 사용하지 않으시니, 치지정의 구석구석을 잘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곳의 구조를 잘 아는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허락해주시 바랍니다. 몽유도원도를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유는, 소인의 노모가 그 사이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소인은 이제 세상사에 미련도 없고, 정을 붙일 사람도 없습니다. 몽유도원도를 마지막으로 찾아보고, 더 이상 없다는 확신이 들면 이를 주상전하께 아뢴 뒤, 홀연히 정치와 권력의 주변을 떠날 생각입니다.
대감께서도 찬시를 붙이셨으니 몽유도원도가 주상전하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림을 그린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 그림이 다시 정치권력과 묶여, 대감의 우려대로 그 그림이 다시 피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소인이 주상전하의 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우려 때문입니다. 대감, 맹세컨대, 몽유도원도를 찾으면 주상전하께로 먼저 달려가지 않고, 대감과 상의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소인이 이런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을 비밀로 지켜주실 것으로 압니다. 대감의 회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화공 안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