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귀성군이 임영대군에게
귀성군이 임영대군에게
1465년 3월 1일
아버님,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떠보니, 뿌연 새벽입니다. 온몸의 뼈들이 헐거운 못들처럼 흔들거리고, 가슴이 쥐어짜듯 아픕니다. 한동안 산에 머물다가 몸이 회복되면 돌아오라는 아버님 말씀에 따라, 오늘 떠나려 합니다. 인사 없이 떠나라는 말씀을 전해 들으니, 욱, 피를 토하는 심정입니다. 가문과 아버님을 욕되고 수치스럽게 했으니, 당연합니다. 엎드려 절을 올리며 아버님,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적어놓겠습니다. 오늘 정말 떠날 것입니다.
저로써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아버님과 제가 궐에 들어가 숙부인 주상전하께 소용 박 씨의 서찰을 내놓았던 날이었습니다. 환관들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려진 직후 아버님이 자리를 피하시고, 저는 주상전하와 독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부들부들 떨리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주상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아버님께서 물으셨지만, 당시에는 무서워서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상전하께서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심부름입니다.
문종 숙부가 왕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당시 수양 숙부 댁에는 뛰어난 장사들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버님도 그 장사들에게 무예를 배우라고 저에게 이르셨고, 숙부 수양대군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적극 권하셨습니다. 저도 무과 급제하려면 실력도 쌓아야 하고 숙부의 후원도 필요해서, 그 댁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는 날인가, 숙부가 저를 부르시더니 서찰 한 통을 내미셨습니다. 아버님께 전하라는 줄 알고 받아들었는데, 뜻밖에도 “뒤뜰 정원에 가면 덕중이 있을 터이니 건네주라”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찾을 때까지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하며, 다시 찾을 때도 귀성군을 통해 찾을 터이니, 다른 누가 내놓으라고 윽박질러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전하거라.”
중요한 내용이 담긴 서찰인 듯 했습니다. 그 많은 아랫것들을 두고 저에게 그 소임을 맡기시다니, 기분이 우쭐해졌습니다. 사실 수양 숙부가 저를 많이 신뢰하시지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변함… 그래서 서찰을 소매부리에 넣고 뒤뜰로 갔습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숙부 댁에는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과수원만큼이나 큰 뜰이 있지 않았습니까. 거센 장사들이나 말 많은 식객들이 드나드는 수양 숙부 댁의 분위기에 비해, 그곳은 좀 다른… 아마 별천지가 있다면, 그런 곳일 것입니다. 하늘과 나무와 짐승이 하나처럼 있는 곳이랄까, 마음이 불안한 소자도 그곳에 들어가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평온해지곤 했으니까요. 그곳에 들어가니, 어디서 소리는 나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귀를 기울이며 살금살금 다가가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보고 싶지?” 여인의 목소리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하얀 토끼의 두 귀를 허공에 움켜쥔 채, 덕중이 토끼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습니다.
화들짝 놀란 덕중이 토끼를 손에서 놓아버렸고, 토끼는 쏜살같이 달아나 사라져버렸습니다. 덕중은 너무 놀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했습니다. 내가 서찰을 내밀자, 손을 벌벌 떨면서 그것을 받아 쥐었습니다. 그러더니, 들릴락 말락 “토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끼가 울타리를 벗어나, 푸성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난 모양이었습니다. 덕중은 토끼를 빨리 잡아야 야채를 망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토끼를 놓친 것이 아무래도 제 불찰인 것 같아서, 함께 토끼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큰 나무 뒤, 짚단 뒤, 혹은 잡목 속도 샅샅이 뒤졌으나, 얼핏 얼핏 흰 토끼는 우리를 놀리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리저리 달리며 헤매니, 두 사람이 얼굴이 벌겋게 열이 나고, 나중에는 얼굴에 땀방울까지 맺힐 정도였습니다. 숙부의 서찰도 전하고 그렇게 간신히 토끼도 잡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숙부는 이미 그때 덕중을 사랑하고 계시지 않았나 합니다. 아랫것들에게 마음을 들킬까 하여, 저에게 그것을 전하게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숙부가 덕중에게 보내는 연서를 제가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지난 번 궐에 들어갔을 때, 소자 정말 오늘 떠날 것이니 말씀드리지만, 주상전하께서 저에게 ‘덕중에게 전했던 그 서찰’을 다시 받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러겠다고 엉겹결에 물러났으나, 16~17년 혹은 그 이상도 더 된 지난날의 그 서찰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소용 박 씨가 저에게 연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고별하는 자리에서, 숙부가 그 옛날 덕중에게 보냈던 연서를 찾아오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상전하께서 저를 한번 떠보시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여, 도리어 그 전각에 갈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용 박 씨에게 직접 돌려받으시면 되는데, 왜 저를 시킨 것인지, 극도로 혼란스러운 마음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끌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숙부 주상전하의 그 명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과거에 그 서찰을 덕중에게 건네주었던, 잠저의 그 뒤뜰을 떠올렸습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고, 저절로 발길이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차! 심장이 뜁니다. 그 상황에 잠저를 찾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오해를 살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소용 박 씨는 궐 안에 있는데, 아니 아마 그때는 이미 처형된 시점이었을 터이니, 그 서찰을 받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잠저에 들렀을 때 미행을 당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살피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미행자를 떼놓기 위해, 저는 사람들이 많은 시전의 저잣거리로 숨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아버님, 오늘 소자는 꼭 떠날 생각입니다. 그러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염려스러운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입궐했던 날, 주상전하와 독대를 하고 나서, 저는 다시 중전마마를 뵈러갔습니다. 중전마마의 눈빛을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 눈빛은 바로 제가 주상전하의 서찰을 덕중에게 전해주던 날, 토끼를 잡느라고 땀을 뻘뻘 흘렀던 바로 그날 본 눈빛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잡은 토끼를 덕중에게 막 건네주고 나오려다가, 그곳에 막 들어서는 숙모와 마주쳤던 것입니다. 당시 숙모는 내가 덕중에게 건네는 서찰은 보지 못하고, 어쩌면 내가 덕중에게 건네는 토끼는 아슬아슬하게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숙부의 서찰을 덕중에게 전하려 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숙모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땀방울이 맺힌 내 얼굴을 말없이 유심히 보시던 그때 숙모의 그 눈빛이, 바로 그날 제가 궐에서 본 눈빛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숙모가 숙부의 서찰을 전하는 광경을 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숙모는 제가 오래 전부터 덕중과 연서를 주고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건넨 것이 숙부의 서찰임을 알지 못할 테니까요. 오랫동안 연서를 주고받다가, 제가 변심하여 서찰 한 통을 들고 궐 안으로 들어와 주상전하께 고해바친 셈이 되는 것이지요. 서찰이 아니라 제가 토끼를 잡아 덕중에게 건네는 장면을 보셨다 해도, 덕중과 예사로운 사이가 아니라고 오해하셨을 것입니다. 서찰을 보았건 토끼를 보았건 혹여 아무 것도 보지 않았건, 숙모는 저와 덕중의 관계를 의심스럽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중을 숙부의 후궁으로 삼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후궁으로 삼도록 적극 권했다는 풍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나올 만큼, 숙모는 덕중을 지극히 아끼셨습니다. 아버님, 궁지에 몰리고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르면서,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버님, 주상전하께서 왜 저에게 그 서찰을 다시 찾아오라고 시키신 것일까요? 소용 박 씨에게 바로 달라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를 시켜 다시 가져오라고 하신 주상전하의 심중에 어떤 뜻이 있는 것인가, 두렵고 불안할 뿐입니다. 그 서찰을 다시 받아오라는 명을 내리신 후, 저를 다시 부르시거나 닦달을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 서찰은 이미 돌려받으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신 것은, 저에게 혼쭐을 내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소용 박 씨의 변덕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서찰 한 통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다니, 아버님, 이 못난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후로 주상전하가 저를 아예 찾지도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아버님, 지난 번 주상전하의 잠저에 들렀다가, 제 뒤를 따르는 사람을 본 이후로, 계속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행동 하나, 말 하나, 모든 것이 가시방석입니다. 최근 제가 입맛을 잃고 몸져누웠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항간에는 소용 박 씨의 죽음 때문에 제가 병들었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가면 발가벗은 채로 저잣거리 한 가운데 선 심정입니다. 아버님이 떠나라고 하시니, 떠날 것입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다시 돌아오면, 어떻게든 주상전하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아, 가문과 아버님의 영광을 다시 찾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뵙게 될 때까지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아버님의 아들 이준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