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섭은 벌떡 일어나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았다. 서진은 얼른 휴지를 뽑아 그의 가운을 닦는다, 손을 닦아준다, 부산을 떨었다. 그는 시뻘건 눈으로 서진을 쏘아보다가 발을 쿵쾅거리며 객실에서 나갔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전세버스를 타고 리펄스 베이로 갔다. 조용하고 아늑한 바닷가 휴양지였다. 서진은 놀랐다. 이곳도 홍콩인가? 그곳은 속초나 경포대 같은 곳보다 더 한가하고 아늑했다. 풍경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나 한호섭과 그녀 사이에는 아름답지 못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신경전을 눈치 빠른 다른 모델들이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들은 서진에 대해 날카로운 경계심을 드러냈다. 한호섭은 서진의 촬영을 맨 마지막으로 미뤘다. 날이 저물 때까지 그녀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한호섭이 짜증을 내며 사진작가에게 더, 더, 하고 요구한 탓이었다. 결국 서진은 카메라 앞에 서보지도 못한 채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저녁을 먹고 그들은 린 콰이 펑의 한 카페로 갔다. 한호섭은 기분이 좀 풀린 듯 싱거운 농담을 떠들어대며 양주를 퍼마셨다. 서진은 몸을 관리하기 위해 저녁을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곧 취할 것이요, 그때부터는 절제력을 잃고 계속 마시게 될 것이 두려웠다. 양주 한 잔을 놓고 그녀는 시간과 씨름을 했다. 비쩍 마른 몸매의 두 모델은 걱정도 되지 않는지 한호섭이 권하는 대로 거침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진이 다 걱정스러웠다. 당장 내일 피부가 탄력을 잃어 흙덩이처럼 되고 말 텐데.
모델들은 어느새 서진을 다시 따돌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한호섭이 서진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하루 종일 보았으니까. 그녀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말을 걸어주지도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화장을 고치고 나온 그녀는 일행이 앉아 있던 탁자가 휑하니 빈 것을 발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것을 모르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한호섭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서진은 빈 탁자에 혼자 앉았다. 기다리면 누구든 오지 않을까. 한호섭은 아니라 해도 누군가 한 사람쯤, 그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와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녀는 물을 청해 마시며 기다렸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한 서양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두 유 마인드? 서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의 눈, 그의 표정은 서진에게는 너무 낯익은 것이었다. 남자들이란 동서양을 가릴 필요 없이 욕망을 가릴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턱을 치켜들며 노, 하고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서양 남자는 아주 기쁜 표정으로 옆의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서진은 다시 노, 노, 노, 하고 되풀이했다. 그제야 그 서양인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며 반복해서 물었다. 노? 노? 유 민··· 유 돈 원···? 서진은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이고 노, 노, 노, 하고 거듭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멀어져갔다.
서진은 갑자기 겁이 났다. 이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혼자서라도 당장 호텔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일찍 쉬면 내일은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올 때는 택시를 탔다. 누군가 이곳을 아는 사람이 목적지를 말했을 것이다.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고 센트럴시티 호텔,이라고 말하면 될까.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서글펐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영어는 한 마디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였다. 낯익은 남자 한 사람이 카페로 들어왔다. 홍콩 사람인 것 같았다. 저 사람을 어디에서 봤던가? 그렇다. 그들의 전세버스 운전기사였다. 서진은 반가워 미스터 위안,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는 모든 영어 단어를 동원하여 센트럴시티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위안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눈두덩을 껌뻑거리며 아, 오, 예, 오케이,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하고 떠벌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위안이 택시를 잡았다. 그는 서진을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은 그 옆에 올라앉았다. 그가 운전기사에게 뭐라고인지 말했다. 센트럴시티 호텔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진이 센트럴시티 호텔,이라고 운전기사에게 말하자 위안이 다시 운전기사에게 빠른 광뚱 어로 지껄여댔다. 운전기사와 위안 사이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바삐 오갔다. 차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위안은 서진에게 오케이, 오케이 하고 거듭 떠들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