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 푸코의 《광기의 역사》, 혹은 침묵의 고고학
오생근(문학평론가·서울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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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흰 가면》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우리에게 친숙한 프란츠 파농은 식민주의 시대의 억압적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한 지식인이며 혁명가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정신의학과 신경의학을 전공한 의학도였다. 그는 알제리 민중의 독립투쟁이 시작되던 무렵, 아랍인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알제리 인들의 정신장애와 광기가 식민지 사회의 폭력적 상황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식민 민족의 정신병 치료란 사회의 완전한 독립과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알제리의 미족해방투쟁에 뛰어든 것이다.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식민지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신경증을 유발하는 정신병적 사회라는 것이 그의 체험적 인식이었다. 파농의 이러한 인식은 정신과 의사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의 일차적 치료의 대상인 개인의 정신질환은 병적인 사회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굳이 파농의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관을 떠나서 정상적인 인간과 비정상적인 인간, 이성의 인간과 광기의 인간을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 올바른 가치규범이 확립된 건강한 사회라면 그러한 구별이 용이하겠지만, 식민지 사회나 독재국가, 아니면 병든 사회에서는 사회에 잘 적응한다는 의미에서의 건강한 인간이 그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모사는 비정상이보다 훨씬 더 병들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건강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정상인의 기준을 논의할 때, 그것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만족시키는 정답의 기준이 되는가의 문제는 계속 의문으로 남을 수 있고, 비정상적인 광기의 행위로 규정짓는 표현 속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이성의 표현과 진실의 의미를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감정의 혼란, 감각적 인식의 마비, 자기 정체성의 결핍, 자신의 감각과 타인의 감각을 구별하지 못하는 감각적 인식의 혼란, 헛소리를 빈번히 토로하는 정신착란, 이성적 사고능력의 마비, 이런 여러 가지 증세를 광기의 상태로 볼 수 있다면, 일반적으로 그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될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런 증세들 중에서 어떤 상태를 더 비중 있게 광기로 보고 광인으로 취급하는가의 문제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광기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과정을 방대한 자료에 의존하면서 끈질기게 추적한 책이다. 그에게 광기는 병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서구문화가 포용하지 않고, 배척했던 인간적 인식과 특성의 한 요소일 뿐이다. 광인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변화는 바로 침묵 속으로 억압된 광기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이성 중심의 사회가 정신과 의사를 대변자로 만들어 광인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 정상인들의 사회로부터 배제한 과정의 역사이다. 푸코는 그렇게 억압된 광기의 침묵과 침묵의 언어를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물론 푸코의 언어는 광기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광기의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이성의 기하학적인 언어의 극단에서 광기의 언어와 만나려는 의지에 충실하려 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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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제목의 이 책은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저자의 광기에 대한 시각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광범위한 자료를 관통하고 있다. 여기서 자자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두 가지 사건은 1656년 파리에서 구빈원 설리보가 함께 6,000명에 달하는 방탕자와 범죄자들을 광인들과 함게 무차별적으로 수용한 ‘대감호’Le grand renfermement의 사건과 18세기 중엽부터 광인들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 처음으로 근대적 정신병원이 만들어진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거쳐 광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격리와 수용의 과정을 거쳐, 비이성적인 것일 뿐 질병이 아니었던 광기가 질병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광기는 사회적 지평 안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광기가 중세 말에 나병이 사라지게 되면서, 나병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처럼 배척과 감금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광기는 한정된 공간에 수용된 대상이 아니라 광기의 사람들을 배에 태워 일정기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게 한 가벼운 조처의 대상이었다. 15세기 말, 제롬 보슈의 그림 <광인들의 배>La Nef des Fous는 바로 그러한 광인들의 삶과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당시의 광기는 공포와 불안의 징후와 더불어 악마가 깃들인 표정이라거나 세기말의 분위기를 예고하는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보슈와 브뤼겔의 그림에서처럼 비극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또한 비판적인 경험으로 표현되는 경우로 구분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광인들의 배>에서처럼 배에 실림 광포한 표정의 사람들이 거대한 세계의 절망과 어둠 속에 서서히 함몰해 가는 비극적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 반면, 모든 인간의 결함을 상징해 주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고 지혜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의미의 광기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가령 에라스무스의 《광기의 예찬》에서처럼 어떤 비극적인 경험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두 번째 경우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에라스무스가 광기를 예찬하면서 일깨우고자 한 것은 광기의 힘도 아니고 비이성의 비극적인 어둠도 아니다. 그것은 현자의 이성으로 통제해야 할 세계, 즉 멀리 두고 비판적으로 대상화하여 이성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인간적인 결함인 것이다. 이렇게 광기는 이성과의 관련 속에 존재하면서부터 점점 표현영역이 좁혀지고, 이성의 통제를 받게 되고, 이성이 부여하는 의미를 그대로 감수하는 입장이 된다. 이런 점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성을 확대한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축소한 시대로 이해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말의 비극적 광기의 폭력성을 통제하면서도 광기의 목소리를 억압하여 침묵의 세계 속으로 떨어지게 만들지는 않았다.
17세기의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주체는 미칠 수가 없다’는 가설을 세워 광기와 사유를 대립적으로 보고 결국 광기를 이성적 사고가 중심이 된 사회로부터 추방하고 감금하는 ‘대감호’의 철학적 논리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나중에 다시 검토하겠지만, 푸코의 이러한 데카르트 해석은 푸코와 데리다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논쟁을 야기시킨 근거가 된다. 푸코는 구빈원의 설립을 선언하는 1656년의 칙령을 검토하면서 결국 광인들이 극빈자나 범죄자, 부도덕한 자, 걸인들과 동일한 범주에서 구빈원에 수용된 까닭을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는 그들의 비이성적 행동 때문이라고 진단하다. 또한 이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강제적으로 일을 부과함으로써 경제적인 효과를 거둔 것은 ‘대감호’의 대상자들이 비생산성 때문에 감금되었다는 추론의 근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푸코는 그 당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이뤄진 ‘대감호’의 조처가 경제적 위기에 권력이 대응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으로, 도덕적 의미와 윤리적 중요성을 강화한 조처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광인들이 걸인이나 나태한 자들과 함께 수용되어 강제적으로 노동을 하게 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뿐 아니라 노동의 성스러운 가치를 이념화하는 부르주아 권력과 사회의 윤리적 명분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대감호’를 통해서 광인은 사회의 윤리적 규범을 위반한 악의 무리들과 함께 사회적 타자로 분류되고, 도덕적인 심판을 받으면서 공공의 질서를 해치는 자로 추문의 대상이거나 가족의 수치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광인과 함께 감금된 사람들 중에 동성애자나 성적 일탈자들이 포함된 것 역시, 광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가정의 윤리와 규범이 연관되어 나타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사회적 타자들의 무차별적인 수용과 감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광기의 감호는 치료를 위한 것도 아니고 광기에 대한 발전된 이해의 표현도 아니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른 평가기준에서 배척되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광기가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무차별적으로 수용됨으로써 마치 동물원의 철창에 갇힌 동물처럼 된 광인들은 더욱 동물성과 야만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광인에 대해 갖는 공포와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구빈원의 정치적·경제적 실패로 인해 감금의 제도가 종식되고 대부분 사회적 타자들의 자유는 허용되었지만 광인들만이 별도로 수용된 근거는 그들의 광포한 동물성을 별도로 훈련시키고 순화시켜야 할 명분과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동물성의 광기는 비이성적이고 반자연적인 것으로 이성의 지혜와 조화로운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19세기 정신의학의 실증주의는 고전주의 시대의 이러한 광기의 인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광기를 인간의 비정상적이고 반자연적인 정신구조 혹은 정신적 질병으로 이해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은 광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광인들이 범죄자, 극빈자, 방탕한 자들과 함께 수용되었다가 그들만 별도로 수용·감금된 까닭은 사회가 그들의 특수성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들을 침묵의 상태로 빠뜨린 사회제도 속에서 광기를 더욱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광인만을 별도로 수용한 기관이건 요양소이건, 그 공간의 탄생은 비이성의 광기와 질병으로서의 광기 혹은 감금된 광기와 치료의 대상인 광기가 혼합해 있는 상태이며, 바로 여기서 근대적 의미의 정신병이 태어나게 된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의 2부는 광기의 성격을 확립한 의학·철학의 텍스트를 통해 광기의 이론적 탐구와 광인을 격리수용한 사회적 조처를 연결시켜 광기의 언어를 침묵 속에 빠뜨린 담론과 제도의 상호관련성을 규명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비밀을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광기의 정의가 ‘정신착란’delire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밭고랑을 뜻하는 lira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니까 deliro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의 밭고랑, 즉 이성의 올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기는 이렇게 이성의 눈먼 상태로서 꿈과 감각적 오류의 접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꿈의 비현실적 이미지와 환각적 상태를 포함하고 있으면서 오류로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류의 빈 공간을 꿈의 이미지로 가득 채우고 환각적인 상태와 허위의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광기는 이런 점에서 꿈보다 더 문제가 많은 상태이며, 꿈의 이미지들에 오류의 판단을 결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기는 이미지와 환각과 꿈과 판단이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이러한 광기의 인식은 결국 광기가 아무것도 아닌 허무의 존재라는 논리를 반영한다. 결국 광기는 더 이상 다른 세계의 징후가 아니라 부재하는 것, 오직 부정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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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의하면 광기의 경험에는 ‘거대한 분리선’이 있다.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없는 어두운 미지 세계의 영역이라면, 다른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있는 오류의 한 조건이다. 이러한 분리선에 따라 동일자와 타자, 초월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공포와 통제의 구분이 이뤄진다. 한 시대의 기본적인 경험은 이와 같은 분리의 형이상학적 구조의 틀에서 표현되고, 그 표현에 따라 광기에 대한 시대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예술작품의 표현은 이러한 분리를 넘어서 광기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고 있다.
푸코는 르네상스의 비이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보슈와 브뤼겔의 그림을 예로 들고, 고전주의적 비이성에 대해서는 라신의 비극 <앙드로마크>를, 근대적 비이성에 대해서는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사드, 고야, 네르발, 휠덜린, 니체, 반 고흐, 루셀, 아르토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작품들은 절대적인 무의미의 광기, 작품의 부재로서의 광기를 존중하고 생생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의 부재라는 것은 광기가 작품으로 형상화되면 광기는 더 이상 광기가 아니라는 논리에서이다. 광기의 작품은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작가는 광기를 이성에 의해 대상화하고 이성적인 언어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광기와 작품은 대립적이고 모순될 수밖에 없다. 위의 작품들은 광기에 대하여 극복의 희망이 없는 모순과 절대적인 분열, 고통스러운 대립의 융합, 한계점의 한계경험을 표현하는데, 가령 르네상스 시대의 비이성은 우주적 차원에서의 모순을 나타낸다면, 고전주의 시대의 비이성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모순을 보여주고, 근대적 이성은 인간학적인 차원에서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푸코는 모든 시대가 대체로 역사적 차이의 외면 속에서 광기에 대한 네 가지 의식의 형태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네 가지 의식의 형태란 방어적 입장에서 광기를 이해하려는 특별한 방식이자 동시에 광기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것 중 첫 번째는 ‘비판적 의식’이다. 이것은 이성이 광기를 순수한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방식으로서,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입장으로 광기를 비난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성과 광기 사이의 이러한 원시적 대립관계는 변증법적으로 반전될 수 있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대화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실천적 의식’인데, 이것은 기존의 확립된 사회규범을 위반하고 사회질서를 해치는 사람들이 바로 광인이라는 인식에서,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의식이다. 또한 세 번째는 언술적 의식으로서 광인에 대해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말하면서 작동하는 의식이다. 여기서는 광기에 대한 이론적 인식도 없고, 가치판단의 확인도 없다. 다만 미친 사람을 보고 “미친 사람이군”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자기는 미치지 않았다는 의식, 정상적이라는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분석적 의식이다. 이것은 지식과 과학의 영역에서 광기의 종류와 구조를 객관성의 표면 위로 올려놓는 것이다. 여기서 광기는 완전히 무시되고 소외된다. 결국 이러한 의식의 형태들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연대적으로 결합하여 광기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방해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에 대한 앎의 의식은 결코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여러 의식들이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가령 17세기와 18세기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인을 감금하는 실천적 의식이 광인을 타자로 이해하는 비판적 의식에 바탕을 두고, 결합하면서 분석적 의식과 언술적 의식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의 근대는 광기의 진실만을 제시한다는 분석적 의식의 주장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의식은 두 가지 결과로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양의 역사가 이성/비이성의 분리를 토대로 전개된 것이라는 점, 두 번째는 그러한 분리의 역사가 비이성의 변주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광기의 거부나 제한과 같은 조처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광기의 경험은 위와 같은 네 가지 의식들의 결함과 파열로 나타난 여러 국면을 넘어서 결국 한계로서의 광기라는 결정적 의미와 배타적 분리의 수용이라는 특수한 양상을 이끌어 들인다. 여기서 광기의 의식뿐 아니라 광기의 의미, 분리의 양식, 지리학적 공간, 기하학적 공간, 사회적 실천, 이론적 대립유형, 종합의 기능 등의 주제에 따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내용을 명쾌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다음의 분류법은 푸코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표 생략)
광기에 대한 위의 네 가지 의식들은 어떤 국면으로 나타나건 결국 광기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푸코는 이러한 의식들이 바탕을 이뤄 형성된 고전적 정신병 연구의 틀이 불가능한 과학과 계몽주의의 오만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의학에서 광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취급된 것일까?
푸코는 광기의 고전적 징후학이 감금의 실천과 일치하고 있으며, 광기의 징후는 과도한 정념이나 정신착란에 의한 이성의 무질서로 형성된다는 것과 그러한 징후들은 식물학자의 식물분류처럼 분류될 수 있는 특정한 신체적 조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비과학적 사례를 열거한다. 광기에 대한 이러한 비과학적 인식에 따른 치료법은 광인을 강제적으로 목욕시키고 구토하게 만드는 등의 원시적 조처로서 육체와 영혼의 균형과 상관성을 연두에 두고, 정신을 치료하기 위해 육체의 원인을 개선시키는 방법이다. 푸코는 덧붙여서 대표적인 네 가지 유형의 광기, 즉 우울증, 편집증, 히스테리, 히포콘드리아가 어떻게 정의되는지 규명한다. 그것에 따르면 우울증은 신체 안에서 무겁고 탁한 수분의 점도로 생긴 결과라는 것이고, 편집증은 수분이 없이 건조한 신체의 징후이며, 히스테리는 신경조직의 과잉작용이고, 히포콘드리아는 신경조직의 취약성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려면 혼탁한 피를 맑은 피로 대체하기 위해 비누와 같은 물질을 사용하고, 편집증 환자를 치료하려면 환자에게 집중적으로 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운동을 규제하여, 침묵을 유지하게 하거나 걷기와 달리기를 시켜 신체적으로 조절하게 하고, 히포콘드리아 환자에게는 신경조직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상당한 분량의 철분을 섭취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광기의 고전적 인식과 원시적 치료법은 근대적 치료법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계보학적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푸코는 설명한다. 광인이 감시와 심판을 받고, 유폐의 대상이 되고 있는 19세기의 과학적 정신의학은 고전주의 시대의 수용소를 대체한 정신병원의 구조를 통해 결국 광인에 대한 새로운 억압형태를 나타낼 뿐이다. 최초의 정신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프티트 메종’La Petite Maison과 같은 기관의 책임자가 의사가 아니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광인들을 미성년의 어린아이들처럼 다루면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광인의 진실을 무시하고 광기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았다. 대부분 그러한 기관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독선적 언어를 광인에게 강요하고, 광인의 생각과 행동을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규범에 맞게 교정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물론 프로이트와 같은 의사가 나타나 정신분석학을 만들어 새로운 정신착란의 개념과 환자와의 대화치료요법을 시도한 것은 획기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광기의 진리를 밝히고 광인을 해방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광기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감동적인 것은 이성 중심적 사회에 의해 억압된 타자, 우리와 전혀 다른 그러한 인간적 실존의 모습과 침묵의 언어를 파악하려는 저자의 철저하고 근본적인 시도 때문이다. 그의 책은 광기의 수난사를 보여주면서 정신의학의 복잡한 역사를 명쾌하게 정리하기 위해 처음부터 우리를 나병의 쇠퇴와 더불어 시작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근대적 정신병원이 탄생되는 과정에서 광기가 어떻게 억압되고, 광인이 어떻게 침묵 속에서 자신의 진실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푸코의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광기의 진실은 억압되었을 뿐 망각될 수는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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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광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의 한 문단을 둘러싼 푸코와 데리다의 해석논쟁이다. 문제가 된 푸코의 데카르트 해석은 600쪽 가까운 이 책 전체의 분량 중에서 3쪽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은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이 책의 제목에 담긴 고전주의 시대라는 시대적 의미와 대감호가 시행된 시대에서 이성의 확립이 이뤄진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그 어떤 내용보다도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기본 개념이 인간의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한편, 사고와 광기의 상호배제적 대립관계를 만들어 놓아 결국 인간성의 일부를 이루는 광기를 배제하게 만들어 결국 이성과 비이성(광기)의 분할선을 그어 광기를 침묵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라면, 이 주제는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데카르트는 《제 1성찰》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지식이 참된 것인가를 알기 위해 그것의 기반이 되는 모든 감각을 의심하기로 하여 꿈과 감각적 오류와 광기의 경우를 하나씩 의심하고 검증해 보는 작업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사고의 확신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철저한 방법론적 회의를 추구하다 보니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물의 영역에서 우리의 판단을 속이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관점에서 데카르트가 검토한 꿈과 감각적 오류와 광기는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꿈과 감각적 오류는 별것이 아닌 허상적인 것으로서 어떤 진실성이나 사실성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반면, 광기의 위험은 꿈과 오류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으로 비중 있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또한 광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철학적 배제는 주체가 진리의 근원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신체로서의 주체도 아니고 의지로서의 주체도 아닌 사유하는 합리적 주체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광기와 대립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광기가 배제되어 있지도 않고, 이성의 담론에서 완전히 추방되어 있지 않다는 반론을 제시한다. 그의 반론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신에 이르기 위하여 실내복을 입고 종이를 손에 들고 불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부터 성찰을 시작하다가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 손과 나의 몸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묻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른 목소리’의 가설을 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다른 목소리의 놀라는 반응을 그대로 받아서 자신이 놀라는 것인 양 꾸미며 그 말을 반복하는 단계에 머문 것이었기에, 광기의 예는 심각하고,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 오류의 한 예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가 감각적 오류의 하나로 본 것을 푸코는 광기의 배제와 감금, 추방의 논리로 파악한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푸코는 데리다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데리다가 텍스트의 좁은 틀 속에 갇혀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만을 해석하고 있다는 반론을 제시하면서, 데카르트에게는 분명히 광기의 거부가 있으며,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텍스트에서 제시한 다른 목소리의 가설은 자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성찰’이라는 제목을 환기시키면서 ‘성찰’의 주제는 성찰의 흐름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해 가며 자기 견해를 강화하고 재검토하면서 생각과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 당연한데, 이 과정에서 성찰의 주체가 의심해 보려는 결심을 할 때 다른 목소리가 개입한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반론과 더불어 푸코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광기와 꿈의 시험에 따른 불균형적 시각을 데리다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을 재론해 볼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다. 그것은 푸코의 입장에 서면 푸코가 옳고, 데리다의 입장에 서면 데리다가 옳게 보이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석이 맞는다고 해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부정될 수 있을까? 문제는 누가 옳은가에 있지 않고, 텍스트를 통한 역사적 인식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푸코가 데리다의 반론을 ‘순진한 담론’이라고 일축한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