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황제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면서 비롯되었다. 중국 고대에 삼황三皇 오제五帝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설 속에 나타나는 임금이다. 황皇은 ‘빛난다’는 뜻이고, 제帝는 ‘하늘을 주재하는 상제’를 뜻한다. 삼황은 초월적인 존재, 오제는 인간적인 존재였다. 중국의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는 요堯와 순舜은 오제에 포함시켜서 제라 불렀고, 그 뒤에 일어난 탕湯과 무武는 왕을 붙여 탕왕, 무왕이라 불렀다.(삼황오제: 고대 중국 전설상의 임금이었던 복희·신농·여왜를 삼황, 황제·전욱·제곡·요·순을 오제라 한다. 그러나 이설이 많다.)
춘추전국시대에 이곳저곳에서 제후들이 일어나 처음에는 봉건국가 주周의 최고 작위인 공公이라고 자칭하다가 나중에는 주의 임금 호칭인 왕이라 표방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환공, 제선왕 따위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스스로 삼황 오제에서 황자와 제자를 따 황제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은 첫 황제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제후와 구분지어 붙였다.
이와 달리 일본은 스스로 천황天皇이라 표방하였고, 우리의 삼국에서는 대왕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의 영향을 적게 받은 탓으로 좀더 자주적인 호칭을 쓸 수 있었으나 삼국은 중국과 근접해 있어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닌 대왕이라는 호칭을 주로 썼던 것이다.
제후 나라는 황제 나라와 엄연히 구분하여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어기면 참칭僭稱이라고 하여 그 시대에 제재를 받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분에 충실한 후세 유가儒家 사학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후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쓸 수 없고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써야한다. 천수는 ‘하늘이 준다’는 뜻이다. 왕건은 고구려의 천손족天孫族 의식을 본받아 이 연호를 썼을 것이다.
다른 의식에서도 황제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왕이 자신을 부를 때 과인寡人 대신 짐朕이라 했고, 신하들이 임금을 부를 때 전하殿下 대신 폐하陛下라고 했다. 임금의 명령을 전傳이나 교敎라 하지 않고 조詔나 칙勅으로, 임금의 부모를 황고皇考와 황비皇妃로, 임금의 아내를 황후皇后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세자世子 대신 태자太子라고 하였다.
임금의 생일을 황제의 격에 따라 절일節日이라 했고, 임금의 생일의식에서 오래 살라는 축하를 천세千歲 대신 만세萬歲라고 했다. 제후 나라의 수도는 도都자나 경京자를 붙일 수 없으나 고려는 수도를 송도 또는 송경이라 하였고 뒤에 개경開經이라 하였으며, 별도인 평양을 서도 또는 서경이라 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호칭은 역대 임금이 시호이다. 제후 나라의 임금은 어디까지나 ‘왕’자를 넣어 시호를 지어야 한다. 삼국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모두 왕자를 붙였다. 그러나 고려는 황제의 격식에 따라 조종祖宗을 붙였다.
조는 국가를 세우거나 위기에서 구제한 임금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守成한 군주에게 붙인다. 나라를 세운 왕건은 태조太祖, 그 뒤를 이은 군주들은 광종光宗 등으로 붙였다. 조종을 사용한 시호는 원元의 내정 간섭으로 자주성이 상실되면서 충렬왕忠烈王, 충숙왕忠肅王 따위로 대치되었다. 사대적인 명분에 충실했던 근세조선에서도 조종의 시호만은 끈질기게 유지했다.
황제에 걸맞은 호칭과 제도는 통치조직과 종실宗室, 종묘宗廟제도에도 적용되었다. 황제는 천명을 받아 등극하였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치른다. 해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원구제圓丘祭라 하고, 제사지내는 장소를 원구단이라 한다. 고려는 원구단을 만들었으나 신라는 설치하지 않았다. 근세조선에 들어와 고려의 제도에 따라 원구제를 지냈으나 중기부터 제후의 나라라고 하여 이를 거의 폐지하였다. 그 뒤 198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완전한 원구단을 설치하였다.
황제는 문장紋章에 용을 사용하고 제후 왕은 봉황을 사용하였다. 고려는 용을 상징물로 삼았는데 근세조선은 봉황을 상징물로 삼았다. 지금 청와대에서 쓰는 대통령의 문장은 봉황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제후의 지위에 해당할까?
황제의 상징색은 황색이다. 황색은 중앙 방위인 토土를 나타낸다. 고려의 고위 벼슬아치들이 주황색, 붉은색, 분홍색을 쓴 것으로 보아 군주는 황색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고려는 국명으로 일반 백성들의 황색옷 착용을 금지하였다.
고려는 비록 황제의 의식과 제도를 따랐으나 완전하게 황제국 행세를 한 것은 아니다. 고려는 후당後唐으로부터 책봉을 받자 천수라는 연호를 버리고 후당의 연호인 장흥長興을 사용하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다가 광종이 다시 독자적으로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썼다. 이렇게 국제 정세에 따라 번복을 거듭하였다.
중국을 차지한 나라는 당연히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 중국의 황제는 사방의 나라들을 복종시켜 강제로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게 하는 세계 질서를 확립하려 들었다.
사대의 예는 크게 두 가지로 규정된다. 하나는 중국 황실의 절일節日에 조공사朝貢使 따위 사신을 정기로 보내는 것이고, 하나는 새 왕이 들어설 때마다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형식과 명분에 지나지 않는 의례였다.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는 후주後周와 송宋으로부터 고려군왕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이는 허울에 지나지 않으므로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는 공식문서에는 황제 칭호나 독자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