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화는 눈시울을 좁힌다. 서편으로 기우는 햇살이 눈에 부셨던 것이다. 햇살뿐만 아니라 바람에 펄럭이는 서희의 연회색 망토 자락과 머리에 쓴 순백색 새틴 머플러도 눈부셨다. 서울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복장 때문이지만 근접을 허용치 않는 위엄과 성숙한 아름다움은 너무 현란하였다. 옛날의 서희는 꽃 같고 구슬같이 영롱하였는데 북변의 바람 탓일까, 낯선 남의 땅, 남의 산천이기 탓일까. 바람은 부드러웠다. 강물엔 완연한 봄빛이 어려 있었다. 기화가 용정촌에 온 지 어느덧 십여 일이 지나갔다. 십여 일은 세월인가 나날인가 시각인가, 자취 없이 달아나고 소망도 없이 기화는 허기를 느낄 뿐이었다.
“절에 가련?”
해서 기화는 서희를 따라 거리에 나온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 대개는 눈을 들어 외경畏敬스런 표정으로 서희를 훔쳐보았으며 기화에게는 호기심의 일별을 던지곤 했다. 무인지경을 가듯 서희의 망토 자락 머플러가 바람에 나부끼고 펄럭인다.
“아씨.”
서희는 잠자코 걷는다.
“아씨는 부처님 은덕을 믿으셔요?”
“글쎄…… 별로.”
“하면은?”
“은덕은커녕,”
모멸의 웃음을 입가에 흘린다.
“부처나 신령 그런 것이 있었으려니 생각해본 일 별로 없어. 어째서 그런 말을 묻는 게지?”
멀리 운흥사 지붕에 눈길을 돌리며 서희는 말했다.
“그렇다면 알 수 없어요. 절에는 어째 가시는지…….”
“습관 아니겠느냐? 할머님과 옛날에.”
서희는 말끝을 맺지 않는다.
“저는 큰 나무만 보아도 무서워요. 눈, 비, 구름, 나는 새를 보아도, 산천 구석구석 넋이 있는 것 같아서.”
“무당 같은 말을 하는군. 넋이 어디 있어?”
“…….”
“저기, 저 절을 지을 때 시조施助한 얘길 들은 모양이구나.”
─ 박경리, 『토지 7』, 마로니에북스2012, 218~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