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치트라』를 읽었을 때, 나는 과연 이 작품이 로맨스 판타지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빈부귀천과 사회적인 규범의 속박을 뛰어넘어 오로지 서로에게 몰입하는 사랑을 낭만적 사랑이라고 한다면, 『치트라』가 그리고 있는 것은 낭만적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을 획득과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취향 웹소설의 문법과 정서에 가깝다. 사실 치트라는 여자 주인공이라기보다 단독적인 주인공에 가깝다. 그녀는 작품 내 모든 사건과 행동을 주도한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성들을 획득하고, 영지를 확장해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따라 기존의 사회 체제와 남녀 젠더 규범이 크게 변화하는 것에 아무런 놀라움이나 감정적 변화를 느끼지 않는다. 권력자의 행동에 따라 사회의 기본 규칙이 바뀌면, 사람들이 이에 적응하기 위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 치트라의 후궁이 된 남성들이 마법으로 아이를 낳아주는데, 그들의 입덧을 도와주고, 치료사를 자주 부르고, 시간을 할애해주는 것만으로도 치트라는 좋은 가장이라 칭찬받는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임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권력”임을 깨닫는다. 치트라는 한국사회에서는 남성만이 갖고 있는 권력을 빼앗아 여성에게 부여한 것이다.
『치트라』는 말하자면 작품 자체가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신의 힘으로 선한 남자들이 아름다워진다면 어떨까? 남자들이 외모에 집착하게 되면 어떨까? 마법과 게임 시스템의 힘으로 남녀 사이의 육체적 차이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마법으로 남성이 출산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남녀의 사회적 위치가 역전된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대담한 상상력이 『치트라』를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낭만적인 연애를 보고 싶은 독자가 『치트라』를 읽는다면 거부감과 함께 어쩌면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치트라』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반反-연애에 가깝기 때문이다. 『치트라』는 ‘판타지’이기에 가능한 과감한 상상력으로 연애라는 위장을 걷어내고 남녀 간에 존재하는 권력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것이 특히 남성 독자 대상 웹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독자의 광범위한 반감과, 그 결과로서 낭만적인 연애가 사라진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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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21세기 한국사회의 로맨스 판타지 독자들은 정말 ‘사랑’하고 싶은 것일까?
― 안지나,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음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