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의 말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나의 견식, 나의 경험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돌연히 동경되고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 화단畫壇을 동경하고, 구미歐美 여자의 활동이 보고 싶었고, 구미인의 생활을 맛보고 싶었다.
나는 실로 미련이 많았다. 그만큼 동경하던 곳이라 가게 된 것이 무한히 기쁘련마는 내 환경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젖먹이 어린애까지 세 아이가 있고,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70 노모가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심기일전의 파동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일가족을 위하여, 내 자신을 위하여, 내 자식을 위하여, 드디어 떠나기를 결정하였다.(7쪽)
만주에서
안동安東,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 건너에 자리한 중국 도시. 지금의 이름은 단둥丹東.현 조선인회 대표 한 사람이 남시역에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신의주역에서는 안동 조선인회 회장과 우리 집에 머물던 학생이 승차하였다. 오전 11시에 안동역에 도착하니 조선 사람, 일본 사람 80여 명이 출영을 나왔다. 모두 손이 으스러져라 붙잡고 흔들며 진정으로 반겨주었다. 숙소는 안동 호텔에 정하였다.
안동현은 지난 6년간 살던 곳이라 눈에 띄는 이상한 것은 없었으니 길가에 있는 포플러까지 반가웠다. 실로 안동현과 우리와는 인연이 깊다. 사업이라고 해본 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 데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처음 맛보아 본 곳도 여기다. 사교에 좀 익숙해진 곳도 이곳이며, 성격이 나빠진 곳도 여기다.
만주에 사는 동포의 경제적 발전은 오직 금융기관에 있다 하는 견지로 안동에 조선인금융회가 설립된 이래 안동 재주 조선인 금융계에 중심기관이 되어, 그 전도가 유망하게 우리 눈에 보일 때에 무한히 기뻤다. 총독부와 남만주철도에 교섭한 결과 수 백여 명의 생도를 수용할 만한 보통학교가 건설되고 남만주철도에서 경영하게 되어, 직원 일동이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는 것을 볼 때 어찌 만족이 없으랴.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의 생활이란 일정한 주소를 가진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정도였다.(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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