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한국심리학회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중년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여기는 한국심리학회입니다. 참사 이후 트라우마를 돕기 위해 전화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 해주세요.”
내 안의 편견이 작동했다. 나는 중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굳게 닫았다. ‘이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을 못 알아들을 거야. 내 마음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날 비난할 수도 있어. 그러게 거기에 왜 갔느냐고, 노는 게 뭐가 좋다고 그곳을 갔느냐고 따져 물으면 어떡하지?’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참사가 벌어진 다음 날 아침, 내 안위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전화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그중에는 올해 마흔을 넘긴 사촌오빠의 전화도 있었다.
“야, 너 거기 갔었어? 아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뭐 좋다고 그렇게 싸돌아다니고 놀러 다녀.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야, 그래도 푹 쉬어.”
분명히 나를 걱정하는 전화였다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힘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노는 게 뭐가 좋다고, 노는 게 뭐라고’라는 식의 말들이. 중년의 남성 심리 상담사도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고 현장에 계셨어요? 생존자세요. 아니면 구조대원이세요? 목격자세요, 아니면 유가족이세요?”
아무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냥 힘이 들어요”라고 대답했다.
상담사는 내게 천천히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보라고 했다. 힘들겠지만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듯 말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처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되짚음을 했다. 29일 저녁 집을 나서던 순간부터 전화기를 들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순서대로 더듬더듬 나열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을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이렇게 설명하고도 스스로 생존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 대신 평평 울기만 했다. 뒤이어 상담사가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은, 이 사건을 뉴스로 전해 듣고 간접적으로 겪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생존자예요. 특별히 초롱 씨는 현장을 경험했기에 더욱 강도가 센 것이고요. 현재 상태가 심각해 보이니 반드시 대면 치료를 권하고 싶고, 연계해주는 시스템을 통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검사를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대화한 바로는 이미 트라우마가 발현된 것 같은데 연계 시스템을 안내해드릴게요.”
통화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일을 처음으로 자세하게 털어놓고 내 상태를 내보였던 것뿐이었다. 울면서 상담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날 거기를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너무 후회돼요.”
그리고 이어진 상담사의 대답은 내게 첫 치료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에요. 그날 거기를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맞아요.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겁니다.”
― 김초롱,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아몬드2023, 48~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