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들이닥친 농성이었지만 야학 사람들 모두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시설에서 살지 않을 권리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야학 학생 누구도 시설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중증장애를 지닌 그들에게 시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구체적 공포이자 예견된 재난이었다. 하지만 나는 탈시설 권리를 열심히 외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그 뜻을 안 건 농성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이 농성의 책임자였던 탈시설운동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김정하 활동가의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탈시설운동은 주거권운동이야. 집을 달라는 투쟁이지.”
2006년 중증장애인들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할 때 어느 복지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니, 장애인한테 비서를 붙여달라는 말입니까? 비장애인한테도 없는 비서를요?”
무지한 관료처럼 나도 생각했다.
‘장애인에게 집을 달라고요? 집은…… 나도 없는데요?’
지인의 집에 얹혀사는 비장애 동료가 떠올랐다. 욕실이 없는 집이라 싱크대에서 머리를 감고 출근하던 친구였다. 열심히 일하는 비장애인도 못 가지는 집을 일도 하지 않는 장애인한테 달라니…… 익숙하게 흐르던 생각의 회로가 갑자기 엉켜버린 채 멈춘 기분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눈을 끔벅거리며 김정하를 바라보았다. 그때 김정하가 기본권으로서의 주거권이나 유럽에 있다는 사회주택 제도에 대해 설명해주었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 내 안에서 와르르 무너졌던 감각만은 생생하다. 미처 의식하지 않았지만 나는 ‘능력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돈을 주고 집을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그 논리대로라면 ‘능력 없고’ 그래서 돈도 없는 이들이 가질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했다. 그건 바로 장애인들이었다. 나의 생각이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향해 마구 던져댔던 짱돌의 실체를 알았던 순간 균열이 간 건 내 안의 어떤 세계였다. 멈추었던 생각의 회로가 방향을 바꿔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와……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이 운동 너무 어이없고 너무 신나네?!’
― 홍은전, 「여는 글: 그들이 온다」 『집으로 가는, 길』, 오월의봄2022, 3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