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노력이 필요 없는 소비는 생물학적 과정의 소모적 성격을 변화시키기보다 더 증가시키고, 마침내 고통과 수고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인류는 전 세계를 ‘소비하고’, 소비하고 싶은 것을 매일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세계와 그 사물적 성격이 완전히 자동화된 삶의 과정의 무자비한 역동성을 견딜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물이 그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매일, 매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지는 세계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자동화의 위험은 ― 훨씬 더 개탄스러운 ― 자연적 삶의 기계화와 인공화가 아니라 삶의 인공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생산력이 매우 강렬한 삶의 과정 속에 흡수되어 수고와 노력 없이 자동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자연적 순환을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기계의 리듬은 삶의 자연적 리듬을 더 확대하고 강렬하게 만들겠지만, 세계와 연관하여 삶의 주요한 특징을 변화시키기보다 더 치명적으로 만들어서 세계의 지속성을 손상시킨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이런 유토피아에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 더욱이 진보는 너무 과대평가되었다. 왜냐하면 진보는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 지배적이던, 착취라는 매우 예외적인 비인간적 조건과 비교되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좀더 긴 시기를 고려한다면, 현재 개인이 향유하는 자유시간의 연간 총계는 현대성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이라기보다 정상상태에 뒤늦게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소비자의 사회라는 유령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현 사회의 이상인 까닭에 더 걱정스럽다. 그 이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적 삶의 궁극적 목표가 부와 풍요와 ‘최대다수의 행복’을 증대하는 것이라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확실한 가정 속에 암시되어 있다. 끝으로 단지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의 오랜 꿈과는 다른, 근대사회의 이 이상은 꿈으로 남는 한 매력적이겠지만, 실현되었을 때에는 곧 바보들의 천국이 되어버릴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제3장 노동 – 17. 소비자의 사회」,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