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친밀하든 간에,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하비투스의 관성 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힌다. 태도나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격적이거나 의도적으로 무례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나 평범한 중산층 정도의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우리도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에 맞부딪힌다. 이는 이성애자가 자기와 대화하는 상대가, 자신이 조롱하고 비방하는 낙인찍힌 종에 속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보지도 않고 동성애자에 관해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교분을 나누는 사람에게, 마치 그 역시 예전부터 자신과 동일한 실존적·문화적 경험을 해왔다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전제함으로써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비록 그것이 상대를 우쭐하게 하고, 실상과 다른 존재 ― 부르주아지의 아이 ― 로 ‘여겨진다’는 자부심 ―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 을 불러일으킬지라도 말이다). 이런 일은 가장 가깝고 가장 오래된, 가장 충실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일어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한 친구에게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어머니를 보러 랭스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 상속자! ― 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어쨌든 공증인사무소에서 유언장을 개봉할 때 네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지.”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어조로 말해진 이 문장은, 심지어 우정관계에서조차 평행선들이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유언장 개봉”이라니! 세상에! 무슨 유언장을 말하는 건가? 유언장을 작성해서 공증해두는 관행이 우리 집안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대체 무엇을 남겨주려고? 민중 계급에서는 세대 간에 어떤 것도 상속되지 않는다. 가치도, 자본도, 집도, 아파트도, 고가구도, 귀중품도… 부모님은 적금통장에 한 해 한 해 어렵게 집어넣은 아주 적은 액수의 저축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그것이 당신 것이라고 여겼다. 그 돈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두 사람의 수입에서 필요한 액수만을 “따로 떼어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돈이 어머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갈 수 있다는 생각은, 그 누군가가 설령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이 몰상식한 것이었다. “그 돈은 내거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걸 모으느라 우리가 얼마나 쪼들리며 살았는데…”
―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문학과지성사2021, 195~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