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에 대한 인간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수준에서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적인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한다. 집단 선택론자들도 경쟁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에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경쟁 집단의 구성원들은 노동조합원이나 군인들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자기 집단의 편을 든다. 그러나 이 경우 집단 선택론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정했는가 하는 것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 간이나 다른 종 간에서 일어난다면, 왜 더 큰 집단 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종은 속屬에 속하고 속은 목目에, 목은 강綱에 속한다. 사자와 영양은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강의 일원이다. 그렇다면 ‘사자는 포유동물의 이익을 위해’ 영양을 죽이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인가? 분명히 포유동물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사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척추동물 문門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