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13년 2월부터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구 5만 명이 조금 안 되는 농촌입니다. 옥천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대학교에도 있었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내기도 했고 다양한 독서모임을 만들기도 했으며 함께 책을 읽으며 공생을 도모했던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옥천에 내려와서는 정당의 정책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주민들과 함께 지역 통계나 기사, 자료를 보며 생활지표를 만드는 작업도 했습니다. 2019년에 이후연구소를 만든 뒤엔 공공성, 사회적 고통, 통치성과 재정, 법률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쓴 책이나 다른 사람의 책으로 북토크를 한 적도 많으니 함께 책을 읽는 과정들을 제법 많이 반복해온 셈입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그동안 이런저런 책을 읽고 활동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고 한국에서 함께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참석하신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왜 사람들은 책을 읽었을까요?
책을 읽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독서회라는 단어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박찬식의 『4.3과 제주역사』각, 2008년의 한 대목입니다.
“구우면 한림리에서는 이익우의 지도하에 있던 김경봉이 조직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그는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이 있기 전부터 한림리에서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다. … 운동방침으로는 ①각 회원은 한 개씩 독서회를 조직하여 동지를 획득하여 교양한다. ②각자의 활동 상황을 다른 이에게 누설하지 않는다 ③책임자는 타지방과의 연락을 비밀스럽게 확대 강화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일제하 제주도에서 활동했던 무명그룹이라는 농민조직, 공산당의 세포조직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왜 하필 독서회를 조직했을까요? ‘교양’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면 뜻이 맞는 사람이나 뜻이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조직방식을 독서회로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 읽는 모임이라고 하면 경찰에게 핑계를 댈 수도 있으니 더 좋았겠지요. 이렇게 보면 독서회는 좀 굉장한 모임처럼 느껴집니다.
비밀결사가 아닌 곳에서도 독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세계 최초의 성공한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로치데일의 역사를 기록한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의 『로치데일 공정선구자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그물코, 2013년의 한 대목입니다.
“조합의 신문열람실은 런던 클럽 못지않게 잘 갖추어져 있다. 도서실에는 2,200권의 양서가 있고 그중에는 엄청난 고가의 책도 많이 있다. 물론 도서실 이용은 무료이다. 조합원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루 12시간 무료로 편리하고 잘 갖추어진 신문열람실과 도서실을 번갈아 드나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밀가루나 양초와 같은 물품을 거래하던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서관이 작은 방 한 칸이었는데 조합이 좀 커지자 도서관부터 확충했습니다. 당시의 런던 클럽은 상류층이 사교를 나누던 곳이었는데, 규모가 그만큼이었다니 놀랍지요. 협동조합이 돈을 벌면 사업에 투자할 일인데 왜 열람실과 도서실에 투자를 했을까요? 협동조합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 그렇지는 않고 아마 조합원들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민주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한 조직인데, 당시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그런 뜻을 품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의 비밀결사처럼 교양을 계몽할 수도 있겠지만 협동조합은 특정한 이념을 미리 정해 놓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것을 학습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홀리요크의 책에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눈부신 상업 활동이 아니라, 거래의 관계를 활기 있게 만드는 ‘새로운 정신’이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서로 친구로서 만난다.”
이 구절에서 뭔가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나요? 새로운 정신과 친구가 만나면 자유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겠죠. 이것이야말로 그 당시 노동자들이 가장 바라던 바가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관계, 당시 전 세계 협동조합에서 만들어지던 독서회는 그런 역할을 했을 겁니다.
또 다른 책으로 가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요, 마거릿 콘이 쓴 『래디컬 스페이스』삼천리, 2013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을 변화시켰던 세 가지 공간 민중회관, 협동조합, 노동회의소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도 독서회가 등장하는데요, 콘은 이런 공간들이 가진 특징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이 공간들은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별이 미약했고 그런 만큼 개방적이었다. 둘째, 이 공간들은 지배적인 시장과 엘리트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적 실천의 매트릭스였다. 셋째, 이 공간들은 다양한 이질적 집단들이 한데 모이는 혼종적인 성격의 허브였다. 넷째, 이 공간들에서는 누구나 발언하고 토의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원칙이 통용되었다. 다섯째, 회원들의 집단적 운영을 통해 물질적ㆍ경제적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자연스레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동원의 토대가 되었다.”
눈에 띄는 키워드를 모아보면 개방적인 공간에서 이질적인 집단/사람들이 모여 발언하고 토론하며 서로의 삶을 지지해주는 대안적인 공간이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이 책에 나오는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감염’입니다. 이질적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감각과 관계, 생각들, 서로 나누는 물품들, 이런 것들이 권력과 세상을 바꾼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책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을까요, 아니면 거기에 가면 누군가를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책이라는 구실이 중요했을까요?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살아가는데 중요했을 겁니다. 책은 거기 있었던 것이고, 모임을 시작할 좋은 핑계였을 것이고, 새로운 생각과 관계를 시작할 중요한 매개였을 테니까요.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독서활동이란 무엇?
과거에는 책이 귀하다 보니 구술하고 강독하는 활동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책에 접근하기 쉽고 전자책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책을 읽는 사람보다는 핸드폰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화를 하는 사람보다 각종 다양한 정보에 접근하거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에게 텍스트는 어떤 의미일까요?
저희 동네에는 주간지도 있고 월간지도 있습니다. 「옥천신문」이 매주 발행되고, 「월간 옥이네」도 발간됩니다. 작은 농촌에 기사화할 이야기가 뭐 그리 많을까 싶지만 엄청 많습니다. 시시콜콜 시골잡지를 표방하는 「월간 옥이네」는 “지역 농촌을 지켜온 이들의 삶, 말없이 보듬어 주던 강, 산, 들녘의 이야기, 고샅과 여울까지 잊히는 것들을 낱낱이 그려”가는 잡지라 할 말이 많습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옥천 지역에 관한 책이 없으니 그분들이 살아있는 텍스트입니다. 「월간 옥이네」를 발간하는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은 북토크와 낭독회만이 아니라 소금쟁이 책방을 운영하고 다양한 강연회와 모임을 주최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기후위기와 농업, 프루동평전, 광역철도에 관한 북토크를 이후연구소와 함께 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발언하는 독서회를 하기는 부담스럽지만 북토크는 가능하고, 여기서의 이야기는 「옥천신문」과 「월간 옥이네」에 기사로 소개되니까요.
예전에 옥천에서 ‘사회적 고통’을 주제로 독서회를 열었을 때 절반은 기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아서 클라인만 등의 『사회적 고통』, 악셀 호네트, 『비규정성의 고통』,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디디에 파생·리샤르 레스만의 『트라우마의 제국』, 캐런 메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쓸데없이 어려운 책을 읽은 것 같습니다. 이 독서회는 어떤 성격이었을까요? 비밀결사였을까요, 협동조합이었을까요, 래디컬 스페이스였을까요?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길어내야 하니 기자들은 바쁩니다. 사람도 만나야 하고 책도 ‘구매’해야 합니다. 독서회를 열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어려운 책이냐, 쉬운 책이냐보다 함께 읽을 만한 책이냐, 혼자 읽어도 되는 책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려운 책을 함께 읽을 수도 있고 동화책을 함께 읽을 수도 있습니다. 책 자체에는 무겁고 가벼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읽는 사람들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을 뿐이죠. 구매한 책을 함께 읽는/읽을 수 있는 기쁨, 지역에서 얼굴만 알던 사람들과의 교류, 평소에 알던 사람과의 조금 더 깊은 이야기, 이런 걸 나누면서 서로 더 친해지고/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독서회에서는 가급적 ‘강독’을 권합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독서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도 중요하지만 타자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주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전달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문자를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함께 전달됩니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서로 교감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쳐다보는 과정이기도 하죠. 또 강독을 하면 책을 못 읽어서 참석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와서 읽으라고 하면 빠지기가 애매하니까요.
그리고 독서모임이 꼭 독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는 순간 책이라는 것의 물질성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책장에 꽂혀 있을 때는 정보의 매개였다면 함께 읽는 순간 뜻과 의지를 형성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땡땡책협동조합에는 행동독서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밀양독서회’, ‘삼평리독서회’가 진행되었는데요. 거리에 나가 앉아서 일정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책을 읽고 헤어지는 단순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묵묵히 책을 읽다가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함께 낭송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우리 삶에 새겨집니다.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년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으로 행하는 독서였다. 읽는 사람은 소리를 크게 내어 읽었고, 흔히 여럿이서 함께 읽었다. 독서행위는 읽혀지는 단어들을 육화시켜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연구는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활동이었고, 그런 연구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적인 것과 동시에 도덕적인 덕성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독서활동은 전인적 참여를 요구했다. 따라서 독서에는 하나의 삶의 방식, 공동체가 전제되었다. 이런 종류의 독서행위는 ‘신성한 읽기lectio divina’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단순히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면, 개인의 지식과 편견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면, 함께 읽는 책은 우리의 삶을 살아나게 합니다. 죽은 단어에 생명을 주는 것이 함께 책을 읽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저자의 뜻을 가장 맞게 해석한 것인지는 해석학 논쟁에 맡겨버리고요.
코로나19가 유행한 뒤로는 모임을 통해 타자를 만나는 경우가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줌을 통해서 더 자주 만나고 회의도 더 많아져서 요즘은 이게 사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만남이 쉬워진 건 좋은 일이지만 그 만남을 위한 준비가 부족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친한 사람들끼리 더 친해진 반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습니다. 온라인 스페이스는 래디컬 스페이스가 될 수 있을까요?
지역공동체란 어떤 장場일까요?
코로나19의 유행 이후에는 줌을 활용해 지역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했는데요, 줌에서는 뒤풀이가 어렵습니다. 사실 뒤풀이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본경기에서 하지 못했던 수다를 나누고 뒷담화도 좀 하고 끼리끼리 모여 노닥거리는 것인데 그런 과정이 생략되니까 모임의 성격이 다시 정보전달 차원으로 축소되는 것 같습니다.
이 콘퍼런스의 주제가 ‘사회적 독서와 지역공동체’인데요, 예전에 제가 지역공동체란 말을 참 좋아하고 자주 썼는데, 요즘은 잘 그러지 않습니다. 공동체란 말을 되새기는 순간 복잡하고 심란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모임이 지역공동체를 강화시킨다고 하지만 저는 독서가 공동체를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와해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적인 공동체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강화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인권의 실천을 강조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권위주의 국가의 지배에 순응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그러면서 기존의 공동체가 분화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요. 개인의 성장을 공동체가 보조를 맞추지 못할 경우 관계는 재편됩니다. 새로운 선택지가 필요하니까요. 다만 공간으로 분리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마주 볼 것인가 하는 과제는 남는 것 같습니다.
동아리란 말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동아리란 같은 목적으로 한패를 이룬 무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독서동아리는 책을 읽는다는 목적으로 한패를 이룬 무리일까요. 그런데 미리 정해진 책을 읽는 게 아니라면 책은 다양하니 같이 읽는 책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 무리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깨어짐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그 선정 과정에서 그 사람의 삶과 고민이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이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핵발전소나 식량위기, 기후위기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어디에 발 딛고 서 있는지를 보면서 스스로 기반을 다져가는 게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책을 함께 읽는 과정의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계가 중요한데, 그런 관계는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냥 자연적으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타자와 ‘약속하는 능력’이 중요하고 타자와 약속하려면 그런 약속의 힘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바빠지는 한국사회에서 독서를 할 시간이 없다고 얘기됩니다. 독일의 작가 미카엘 엔데M. Ende의 소설 『모모』에서 시간도둑들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모모의 능력을 시기합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이 없는 것일까요?
점점 더 시간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30년 기후위기 터닝포인트, 2050 탄소중립계획, 이렇게 몇 년으로 얘기되는 시대는 흔치 않았습니다밀레니엄 정도였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제가 최근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번역한 『심층적응』착한책가게, 2022년에서 저자들은 지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삶에 관해 얘기합니다. “쓸모없고 유해한 정신 ‘지도’에 대한 의존을 포기하고 이제는 잊혀진 존재 방식과 지식 습득 방식을 재발견하고 복원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 시대에 책을 함께 읽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맙습니다.
★ 11월 22일에 열린 「2022 사회적 독서 콘퍼런스: 독서동아리와 지역공동체」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