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개인 서재
- 독서와 공감은 좋은 것인가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책을 한 권 이상 읽어야 잠이 들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장서는 약 1만 6,300권이다. 이런 독서와 책에 대한 공감 때문에 히틀러는 악마가 되었다. 독일의 시민들도 히틀러에 공감했다. 그렇다면 독서와 공감은 좋은 것일까? 그의 독서와 공감을 추적해 보자.
히틀러를 정치로 이끈 책은 안톤 드렉슬러의 『나의 정치 인생』이다. 드렉슬러는 학력이 낮은 철도수리공에서 정치인이 되었다.1) 히틀러는 그의 삶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책의 저자가 중학교 중퇴인 자신처럼 학력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정치를 결심한다. 히틀러는 책의 내용에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나의 정치 인생』은 당시 독일인의 불행이 유대인들이 독일경제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설파했다. 히틀러는 이 증오에 공감한다. 이후 히틀러가 줄을 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은 모두 인종주의에 관련되어 있다:
“위대한 사상가들과 고전이 빠진 자리에 대신 들어간 책들, 히틀러가 진정으로 깊이 감동하며 탐독하고 영향을 받은 책들은 군사학에 관련된 백과사전과 싸구려 신비주의 서적들, 그리고 우생학과 인종주의에 관한 책들이었다. 매디슨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한스 귄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따위의 책들은 나치의 ‘빌딩 블록’이 되었다”(라이백. p.185)2)
히틀러의 독서와 공감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한마디로 편향된 독서와 편향된 정보에 대한 공감이 문제였다.
“히틀러는 독서를 사전에 이미 형성된 관념의 ‘모자이크’를 채우기 위해 ‘돌’을 모으는 과정에 비유했다. 그는 차례나 색인을 살펴본 다음에 해당 장章을 펼쳐서 ‘쓸 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았다. 때로는 결론부터 읽어서 무엇을 기대할지 사전에 판단했다”(라이백. p.191)
결론이 정해진 이처럼 편향된 독서를 통해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의 연설에서 독일인이 사슬에 묶여서 유대인에게 착취당하는 존재로 묘사했다.”(브라이트하우프트. p.242)3)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민족의 처지에 분노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어느 나라의 국경에도 얽매이지 않는 반면에 독일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사슬에 묶인 채’ 유대인들의 금융자본에 착취당하고 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브라이트하우프트. p. 287)
공감으로 똘똘 뭉친 히틀러와 히틀러의 시민들은 현대판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베를린 분서책을 불사름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마자 히틀러와 괴벨스의 주도로 5월10일부터 4주 동안 히틀러의 입장과 다른 서적을 불태운다. 100여 년 전에 하인리히 하이네가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는 예언처럼, 히틀러와 그의 시민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현대판 갱유선비를 생매장함를 단행했다.
두 공감, 공감편향과 사회적 공감
공감은 나쁜 것일까? 히틀러와 히틀러 시민들의 공감은 분명 나쁜 것이었다. 공감은 “함께 체험하는 것co-experience”이다. 이것은 “대개 상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의 반응을 공유하며 그의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는 말이다.”(브라이트하우프트. p.16) “공감능력을 갖춘 존재는 다른 존재의 요구 사항을 인지하고 반응할 수 있다.”(브라이트하우프트. p. 27) 이렇게 본다면 공감은 그 자체로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일까? 공감편향이 문제이다. 공감편향Empathie-Bias은 ‘공감의 선입견’, ‘감정이입충동’, ‘과잉된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감은 자기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브라이트하우프트. pp. 94-98 참조) 자기상실은 “다른 사람이 자기화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비해 더 우월하고 현실적이고 중요한 이념으로서 다른 사람이 생겨나고 투사된다.”(브라이트하우프트. p. 98)4) 이처럼 공감편향은 자신이 동의하는 것에만 공감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악한 것이 된다. 이것은 시민들을 소망적 사고와 안톤의 실명증으로 이끈다. “소망적 사고”란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욕망“소망” 때문에 사실과 상관없이 그렇게 믿는 것을 말한다. 안톤의 실명증은 실명으로 보이지 않는데도, 보인다고 생각하는 희귀병이다. 이 환자는 보이지 않아 쓰러져도 자신이 실수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공감편향과 대비되는 공감이 사회적 공감이다. “사회적 공감은 세상을 보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자 틀이다. 사회적 공감은 어떤 능력들의 훈련과 관련이 있고 개인적 공감에 토대를 두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세상을 보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시걸. p.311)5) 이때 사회적 공감은 늘 비판을 수반하고 있어야 한다. 비판이 없는 사회적 공감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악마로 묘사하고 이것을 시민들과 공감하고자 했다. 시민들은 사실을 따지지 않고 침묵하거나 히틀러에 공감했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을 ‘고의적인 태만함’이라고 표현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레비. p. 276)6)
사회적 공감은 비판과 질문의 과정 속에서 생겨나야 한다. 히틀러의 시민들은 히틀러가 가르키는 달만 보았다. ‘달을 가리키면서 달을 보라는 놈’달달놈을 봤어야 했다. 즉 권력을 보고, 달달놈의 공감편향이 사회화될 수 있는 당시의 독일 사회의 구조를 봤어야 했다.
사회적 공감은 사회적인 것에 비판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즉 “억압을 낳은 구체적인 상황”에 주목하고 그것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다.(『페다고지』. p. 59)7) 이처럼 사회적 공감은 세상읽기를 통해 형성된다.
상이한 독서, 개인적 독서와 사회적 독서
어떻게 공감편향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공감이 가능할까? 브라이트하우프트는 학습을 통해 공감편향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감은 오직 학습을 통해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부분적인 공감 차단의 메커니즘이나 기술이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관점의 상실에 시달리며 구조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브라이트하우프트. pp. 98-99)
스톡홀름 증후군은 납치범과 같은 가해자에 공감하는 현상이다. 전후 독일은 공감편향을 벗어나는 교육론에 합의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는 세 가지 합의에 기반한다. 첫째 원칙은 강제성 금지로써 강압적인 주입식 교육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논쟁성 유지이다. 모든 문제를 쟁점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기 목소리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즉 정치적 행위능력 강화의 원칙이다. 한마디로 이 합의는 모든 문제를 논쟁으로 드러내고 그 논쟁들 숲에서 자신의 견해를 갖고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논쟁성을 통한 세상읽기의 사회적 독서의 방법론은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토론에서 발견된다.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따라서 상대를 보고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림 1]의 첫 번째 그림은 AC를 아는 기준과 BC를 아는 아름이 만난다. 먼저 두 번째 그림에서 보듯이 기준이 자신이 아는 a를 이야기하면, 아름이는 b만큼 지식이 늘어날 것이다. 즉 만나고 나서 ab만큼의 지식이 늘어난 것이다. [그림 1]의 세 번째 그림에서 이제는 아름이가 c만큼 말한다. 그러면 기준이 d만큼 새로운 지식이 생긴다.
[그림 3]에서는 대화 과정에서 생긴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기준이는 처음에 AC를 알던 것에서 ACcd를, 아름이는 BC를 알던 것에서 BCab의 지식을 갖게 되었다. 각각 상대로부터 토론하는 과정에서 듣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공감대가 처음에는 C였는데, aCc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상대방에 동의는 하지 못할지라도 인정을 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방식의 토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독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독서를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점이다. [그림 3]에서처럼 최소한 기준이와 아름이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대화한다. 둘째, 세상읽기 독서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해서 토론을 함으로써, 각자 자신을 둘러봄과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를 이해한다. 프레이리는 글읽기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 세상읽기라고 주장했다:
“세계 읽기는 항상 글 읽기에 선행한다. 그리고 글 읽기는 계속해서 세계 읽기를 내포한다. (중략) 단순히 세계 읽기뿐만 아니라 쓰기와 다시 쓰기, 다시 말해 글을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글 읽기에 선행한다. 내가 보기에 문해교육 과정의 중심에는 바로 이와 같은 역동적인 운동이 있다.”(프레이리. p.7)8)
이런 점에서 시민문해교육은 함께 책을 매개로 세상을 읽는 과정을 의미한다. 셋째, 사회적 공감을 지향하는 독서이다. 앞서 보았듯이 대화를 하면서 공감이 증가했다. 이것은 상대가 이해하는 세상 속으로 내가 더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공감이 증가할 것이다. 넷째, 이런 과정의 독서는 모두가 학생이고 모두가 선생이다. 즉 내가 말하면 나는 선생이 되고 나머지는 열심히 듣는 학생이다. 그런데 상대가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토론하는 동료가 된다. 따라서 개인적 독서는 개인적 공감으로 귀결되지만, 사회적 독서는 개인의 공감편향으로부터 사회적 공감으로 갈 개연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프레이리는 토론하는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이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독서는 토론을 통해 세상읽기를 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공감을 하고, 이렇게 공감한 사람들이 함께 세상을 만드는 행위이다.
사회적 공감으로 향하는 사회적 독서가 진행되려면 참여자들은 솔직해야 한다. 사회적 독서는 상대방의 지식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과 세계관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솔직해야 하고, 솔직할 때 존중해야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나와 다를 때 그것을 우열의 눈이 아니라 차이의 관점에서 인정해야 한다. 즉 동의가 아니라 인정이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편안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학습동아리, 민주주의와 사회적 독서의 공간
히틀러의 독서가 골방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사회적 독서는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광장의 가장 최소단위가 학습동아리이다. 학습동아리는 도처에 존재하는 차이가 편안히 드러나는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민주주의와 광장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책이 『작업장과 도서관』이다.9) 책의 부제인, ‘스웨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에서 보듯이 1970년대 말 이후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받았을 때 두 국가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한다. 이때 영국은 신자유주의에 가깝게 다가섰다면, 스웨덴은 여전히 복지국가의 길을 유지한다. 두 국가 간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진보정당들 간의 노선의 차이에 있다.
즉 진보정당이었던 영국의 신노동당과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영국의 신노동당은 빅토리아 시대처럼 세계의 작업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도서관을 강조했다:
“신노동당이 지식경제를 빅토리아 시대의 작업장과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했다면,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지식사회가 19세기 말에 문자해독력을 확산시키고 노동운동의 중요한 토대 역할을 한 자기 교육 운동의 논리적 연장이라고 이야기했다. 1990년대에 지방 전문대학이 설립된 것은 노동운동 초기에 학습 서클을 통해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고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계급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에 비견됐다. 공부모임은 지식사회를 위한 조직화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스웨덴에서 지식경제에 대한 묘사로서 대영제국의 작업장에 해당하는 것은 공공도서관인 민중문고, 즉 이동식 도서관의 순회로 시작해 결국에는 각 마을의 중심기관으로 자리 잡은 민중도서관들이었다.”(안데르손. pp. 111-112)
이상에서 보듯이 “19세기 말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교육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이 운동을 통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문자 해독 능력을 갖게 됐고 산업사회에 대처할 수 있는 비판적 시민으로 거듭났다. 이 운동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빈곤층이나 벽촌 주민에게 책 읽을 기회를 열어준 순회도서관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지식정보화의 물결 속에 필요한 것이 이런 순회도서관 같은 노력이라고 보았다.”(장석준. “해제”. 안데르손. p. 287) 두 정당 간의 상이한 태도는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스웨덴의 구호를 인용하면, ‘지식이 성장할수록 우리는 이를 더 많이 함께 나눈다.’ 지식경제를 묘사하는 당의 수사에 사용된 핵심비유는 도서관, 혹은 학습 써클이었다. … 반면에 신노동당은 1990년대에, 지식경제가 영국이 전 세계의 전자 작업장으로 부흥할 기회라고 이야기했다. 신노동당에게 지식은 지식경제의 시장에서 교환·판매되는 경쟁적 상품이자 개인적 재화였다.”(안데르손. pp. 14-15)
이처럼 영국이 “일하고 학습할 개인의 개인의 의무를 관리”하려고 했다면, 스웨덴은 “일하고 학습할 개인의 권리를 관리”하고자 했다.(안데르손. p. 232) 이에 대해 저자 안데르손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자기발전의 권리와 계발의 의무는 같은 게 아니다. ‘책임 없이 권리 없다’와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서로 매우 다른 개혁 전략이다.”(안데르손. p. 232)
일할 의무를 다했을 때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신노동당의 입장은 영국의 신노동당 수상 고든 브라운이 “변화가 없다면 사회보장도 없다”는 언급에서 볼 수 있다. 반면 스웨덴 사민당 지도부는 “사회보장 없이는 변화도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안데르손. p. 221):
“[영국의] 근로복지전략은 생산 참여에 따라 조건부로 권리를 인정하며, 여기에서 권리란 의무의 완수를 통해 획득하는 무엇이다. … 반면 스웨덴의 생산주의는 사회적 권리 부여와 사회보장의 확대가 생산 참여의 필수 전제라는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일할 의무가 아니라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할 개인의 권리였다.”(안데르손. p. 227)
이상에서 보듯이 1980년대 이후 신노동당은 빅토리아 시대의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으로 돌아가자면 작업장을 강조했다. 반면, 스웨덴은 복지국가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연대와 협동의 장소인 학습동아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스웨덴이 학습동아리 민주주의로 불리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파고 앞에서도 사회적 독서의 광장을 살려냈고, 그곳에서 사회적 공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계속)
1) 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5/article_no/1691
2) 티머시 W. 라이백. 『히틀러의 비밀 서재: 어느 독서광의 기이한 자기개발』. 글항아리.
2020.
3)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감의 두 얼굴』. 소소의책. 2019.
4) “초인으로 보이는 영화 스타들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공감적인 자기 상실의 형태로 나타날 수가 있다. 자아 또는 ‘나’를 갖고 있는 자는 늘 다른 사람인 것이다”(브라이트하우프트. p. 98).
5) 엘리자베스 A. 시걸. 『사회적 독서』. 생각이음. 2019.
6)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7)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그린비. 2018.
8) 프레이리. 『문해교육: 파울로 프레이리의 글 읽기와 세계 읽기』. 학이시습. 2014.
9) 옌뉘 안데르손. 『도서관과 작업장: 스웨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 책세상.
2017.
★ 이 글은 2020년 11월 26일에 열린 〈2020 사회적 독서 콘퍼런스〉의 발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