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현재의 미디어 변동을 ‘문명사적 변환’이라 칭합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텍스트와 책 중심의 리터러시가 동영상과 디지털 미디어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이는 종래에 널리 사용되던 정의 중 하나인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UNESCO, 2004으로서의 리터러시가 영상과 디지털 플랫폼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는 과학과 기술, 문학과 철학, 공감과 상상력의 영역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동영상의 영향이 확대될지는 모르지만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켜 온 텍스트의 중요성이 순식간에 줄어들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독서 생태계는 다른 매체와의 경쟁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의 설명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2020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9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성인의 종이책 연간 독서율은 52.1%, 독서량은 6.1권이었다. 2017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7.8포인트, 2.2권이 줄어든 수치다. 종이책을 매일 읽는 비율은 성인이 2.3%, 초·중·고 학생은 15.4%로 나타났다. 가장 자주 이용하는 매체는 성인의 경우 인터넷신문, 학생은 웹툰으로, 각각 응답자의 27.9%, 36.6%를 차지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성인 응답자 다수가 ‘책 이외에 다른 콘텐츠를 이용하기 때문에’를 독서를 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29.1%로 답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리터러시 활동의 핵심을 이루는 책읽기가 미디어의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성우, 2020)**
*문화체육관광부. (2020). 2019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김성우. (2020). ‘읽고 쓴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을 이해하기 위한 네 가지 관점. 여주세종문화재단 2020 한글날 학술대회. 「한글, 문해력, 민주주의」.
그렇다면 미디어가 급격히 변동하는 시기 독서와 리터러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위한 책읽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이에 대한 정답은 없겠습니다만, 다음 네 가지 이야기를 통하여 현 시기 독서와 리터러시를 성찰하고 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학생들의 유튜브와 책에 대한 메타포 ―
고교생들에게 책과 유튜브는 무엇인가?
아래는 제가 한 고등학교에서 한 ‘유튜브의 시대,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받은 유튜브와 책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학생들은 아래 예시문을 보고 즉석에서 자신만의 은유를 만들었습니다.
아래에 들어갈 수 있는 말을 자유롭게 상상해 보세요.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떠오르는 대로 유튜브와 책읽기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시면 됩니다.
책읽기는 나에게 OOO이다. 왜냐하면 _______________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OOO이다. 왜냐하면 _______________이기 때문이다.
① 책읽기는 초등학교이다. 옛날에는 좋아했지만 굳이 안 돌아가고 싶은 곳인데 책읽기도 옛날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별로 재미없다.
유튜브는 삶의 낙이다. 왜냐하면 너무 재밌기 때문이다.
② 책읽기는 나에게 밥이다. 항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튜브 시청은 지옥이다. 한번 빠지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③ 책읽기는 나에게 장기적인 즐거움이다. 처음에는 읽기 힘들지만 다 읽은 후에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단기적인 즐거움이다. 듣는 즉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④ 책읽기는 나에게 휴식처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으면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책이다. 왜냐하면 책처럼 새로운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⑤ 책읽기는 나에게 악몽이다. 왜냐하면 하기는 싫지만 현대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사탕이다. 왜냐하면 재미있지만 점점 나를 갉아 먹기 때문이다.
⑥유튜브는 나에게 간식거리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계속 보게 되기 때문이다.
⑦ 책읽기는 나에게 집밥이다. 왜냐하면 오래 걸리지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즉석식품이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영양가도 있으며 다시 봐도 재밌기 때문이다.
⑧ 책읽기는 나에게 운동이다. 해야하는 것은 알지만 즐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마약이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⑨ 유튜브는 나에게 빈틈없는 삶을 채워주는 물이다. 남는 시간엔 대부분 유튜브를 보기 때문이다.
⑩ 유튜브는 나에게 '깨진 장독대'이다. 정신을 놓고 나에게 필요 없는 내용을 볼 때는 깨진 부분으로 계속 시간과 의미가 빠져나가지만, 정신을 차리고 깨진 부분을 막고 본다면, 내 안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메타포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묵직합니다. 리터러시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현재의 미디어 변화를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그들의 리터러시가 잘못되었다’고 쉽게 재단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리터러시를 이야기하는 우리 자신의 리터러시를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핵심 질문: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삶과 미디어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까?
책읽기의 풍경 ―
리터러시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이다
고등학생 몇 명이 각자의 손에 책을 들고 서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야야야 이 책 표지 봐봐. 환상이지? 책이 어떻게 이렇게 빠졌냐?”
“와 그림체 정말 좋다. 색감도 너무 예쁘고.”
“난 이 책 봤는데… 여기 줄 친 이 문장 끝내주지 않니? 랩 같기도 하고.”
“여기에서 이런 단어를 쓰다니. 작가가 정말 미쳤어, 미쳤어.”
“와 정말 최고의 메타포네.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
“소설 첫 문장 이렇게 시작하잖아? 근데 마지막에 또 이렇게 끝난다. 뭔가 신비롭게 연결된 느낌이지 않아?”
“이 작가는 대사 치는 게 너무 생생해. 실제 대화를 녹취한 거 같다니까?”
“이거 읽고 나니까 이 작가 다른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 같이 읽어볼 사람?”
학생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게임보다 더 흥미로운 책 이야기, 상상이나 해봤을까요. 책을 가지고 이렇게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난생처음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제가 상상해 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근데 또 이런 장면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어떡하면 이런 장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한 주제와 연결시켜 보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유튜브와 책은 어떻게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까요?”
책읽기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일지 모릅니다. 삶에서 출발해서 삶으로 돌아가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즐거움의 독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요? 우리 사회의 독서문화가 학생들의 미디어 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유튜브가 왜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학생의 답변이 떠오릅니다.
“유튜브는 자유로워요. 재미있는데, 자유롭잖아요.”
핵심 질문: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로부터, 특히 유튜브로부터 독서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말, “우리 이야기잖아.” ―
관계를 구축하는 리터러시, 리터러시를 만드는 관계
“문해력에서 문이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관련 논의들에서는 관계 혹은 관계성이라는 것이 거세된 채, 내가 혹은 상대가 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텍스트’, ‘너-텍스트’는 보는데 ‘나와 너’, 궁극적으로 ‘현재의 맥락에서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나와 너’를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이건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제가 겪은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모 잡지에서 청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주제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말’이었는데, 그때 쓴 글이 제가 5년여 동안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엮어 『어머니와 나』쇤하이트, 2018라는 책을 냈을 때의 이야기예요. 공부 때문에 타지에서 좀 오래 살았는데, 돌아와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어요. 그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기억할 만한 대화를 녹취하기 시작했고 이게 5년여 쌓이니 꽤 두툼해졌죠. 평범한 일상의 대화들이었지만 대화를 기록하면서 리터러시에서 관계라는 측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나누고 이해한다는 게 단지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거죠.
그 책이 나온 다음에 어머니를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면서 책을 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어머니한테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성우야, 책을 다 읽었다.”라고요. 책을 드린 지 4시간이 채 안 되었는데,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다 읽으셨던 거예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판형도 작고 쪽수가 많지 않은 책이지만 한 권이잖아요. 솔직히 저는 서너 시간 동안 집중해서 책 한 권을 읽을 만한 능력이 어머니한테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기독교인이라 성경을 읽긴 하시지만 문해에 익숙하신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서너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으신 거예요. “어떻게 다 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우리 이야기잖아.”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어머니 얘기를 왜 하냐면, 어머니는 성경을 여러 번 읽으셨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셨어요. 그런데 한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내신 거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자기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제게 법학자가 쓴 논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할 것이고, 못 읽어내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내가 원하는 내 삶의 텍스트를 써내고, 읽어내고, 평가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거예요.”*
*김성우, 엄기호(2020).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따비). 46-47
핵심 질문: 우리의 리터러시 활동은 어떤 관계를 만들고 어떤 권력을 생산합니까? 우리의 리터러시가 ‘메인스트림’에 매여있지는 않습니까?
“문해력 떨어지는 사람들”이 문제? ―
‘완벽히 다른 맥락을 구축하는 시대’에
사회적 독서의 책무는 무엇인가?
2년쯤 전이었습니다. 강의 시간이 빠듯해서 택시를 탔습니다. 보통 택시를 타면 기사님께서 “어디 가세요.” 묻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날의 대화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기사께서 말을 건넨다.)
“근데 그거 알아요?”
“네? 뭘….”
“북한군 월급, 그거 대한민국이 주는 거예요. 국민 세금으로.”
“네?? 설마요. ㅎ”
“어이 참 모르시는구만. 북한군 병사들 농협 통장 하나씩 있는데, 거기에 대한민국 정부가 꽂아주는 거라니깐요.”
“아닐 것 같은데요? ㅎㅎ”
“어이, 이 사람이 뉴스도 안보나. 세상 물정 모르네.”
“어디서 보셨는데요?”
“그거 유튜브 찾아봐요. 다 나오니깐.”
“네. 알겠습니다. (정색) ○○ 가주세요.”
“….”
대화를 나누고 거울로 슬쩍 살피니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이없는 ‘공격’에 기분이 상했지만 마음 한 끝이 아려왔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이런 일들이 그치지 않을까요. 그는 저에게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되었고, 저는 그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천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흔히 소통의 실패의 이유를 말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찾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 소통의 ‘위기’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맥락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비해 우리는 자신의 맥락을 구축할 수 있는 상황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원하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성향에 맞는 채널들만 구독합니다. 점점 좋은 책을 골고루 읽을 만한 여유는 없어집니다. 공동체가 완전히 동일한 맥락을 구축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 비난하는 형국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바벨탑’이 아닌 ‘다리’로서의 리터러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핵심 질문: 거의 완벽히 ‘부족화된’ 맥락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독서가 필요할까요? 가족은, 지역사회는, 학교는, 직장은, 소셜 네트워크는, 출판계는, 독서지원 단체는, 리터러시 실천가와 비평가들은 어떤 독서문화를 만들어가야 할까요?
맺으며 ―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위하여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앞으로의 리터러시 교육과 실천, 독서운동의 방향이 네 가지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텍스트 리터러시 중심에서 생애사 주기에 따른 멀티리티러시의 확장과 발달로의 이행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되, 시험과 평가, 실적 위주의 독서가 아니라 기쁨과 재미, 성장을 도모하는 독서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독서와 디지털 매체를 연결하고 다양한 미디어들이 상호 교섭, 침투할 수 있는 전략과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리터러시를 특정 세대의 문제로 보는 관점에서 전 연령대와 사회 계층 간의 상호 소통과 협력의 문제로 보는 관점으로의 이행입니다. 리터러시는 젊은 층의 문제나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전사회적 과제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텍스트 해독 중심의 리터러시 활동에서 관계와 맥락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고 타자의 삶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는 리터러시 활동으로의 이행입니다. 텍스트는 언제나 컨텍스트 하에서 작동된다는 것, 주체들의 관계가 달라지면 컨텍스트와 텍스트가 맺는 관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독서활동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개별 주체의 역량으로서의 리터러시라는 개인주의적 담론에서 배움과 성장의 조건 및 사회적 인프라스트럭쳐로서의 리터러시라는 공공성 담론으로의 이행이 절실합니다. 문해력을 급진적으로 사회화하는 다양한 담론적 실천이 요구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향성 하에서 우리는 ‘사회적 독서’에, ‘삶을 위한 리터러시’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이 글은 2020년 11월 26일에 열린 〈2020 사회적 독서 콘퍼런스〉의 발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