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서문이나 서론에는 “저자가 책을 쓴 목적, 책의 핵심 개념과 방법론 그리고 저술의 순서”가 담기게 된다. 더러는 감사의 말이나 헌정사가 포함되기도 한다. 감사의 말, 헌정사는 간명할수록 그 감사가 크고 깊게 느껴질 것이다. 감사의 대상에 가족이 포함되는 건 남사스럽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사무치면 쓰랄 수밖에. 써도 짧게 직계 가족으로 한정하는 게 좋을 테고, 출판사 사장에게 감사말 쓰는 건 ‘乙性’의 표출로 간주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외국대학에 재직 중인 자기 지도교수 책을 번역한 이가 감사의 말에서 지도교수에게도 “선생님”, 출판사 사장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두 사람을 동급으로 만든 책을 읽은 적이 있다. 2014년에 읽은 책 중에는 “책을 펴내며”를 구성하는 21개의 문단 중에서 5개 문단을 헌사로 할당한 것도 있었다. 첫째가 “명망 있는 출판사와 좋은 편집자”에게, 둘째가 “대학원생들에게”, 셋째가 “두 아이들에게”, 넷째가 “작은 아이”와의 대화내용, 다섯째가 “아내”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자못 흥미로우면서도 괴이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정사는 표면적으로는 낯 간지러우면서도 텍스트 해석의 깊은 통로를 열어주는 관문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에서 발작적으로 등장하는 헌정사의 내용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헌정사는 본래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헌정사를 통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군주론 헌정사Dedica는 ‘니콜라우스 마클라벨루스가 위대한 라우렌시우스 메디치스에게Nicolaus Maclavellus ad Magnificum Laurentium Medicem’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내용은 이탈리아 어로 쓰였는데 제목은 라틴 어이다. 제목 이야기가 나온 참에 ‘군주론’이라는 책 제목도 다시 생각해보자.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붙인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친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에게 보낸 편지(1513년 12월 10일 자)에서 “군주국에 대하여De Principatibus”뭔가를 쓰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그게 우리가 ‘군주론’이라고 부르는 책일 정황이 충분하므로 이 책은 ‘군주국론’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통칭 군주론은 이탈리아 어로 쓰였다. 장 제목들도 그러하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헌정사만 제목은 라틴 어, 내용은 이탈리아 어로 쓰였다. 왜 그랬을까? 분명히 마키아벨리는 라틴 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이였다. 헌정사만이 아니라 군주론 전체도 라틴 어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헌정사 제목만 라틴 어로 썼다. 한번은 물어보아야 할 물음이다. 왜 그랬을까?
헌정사는 7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짧다. 그것이 3문단으로 나뉘어 있다. 문장 1, 2가 첫 문단, 문장 3, 4, 5가 둘째 문단, 문장 6, 7이 셋째 문단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문장 1은, 군주에게 “은혜grazia”를 얻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나 군주가 가장 기뻐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군주를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것으로 흔히 등장하는 것은 마필, 갑옷, 금실로 수놓은 천, 보석, 장신구 등이라는 것이다. 당시 세상에서 흔히 통용되는 귀중품의 목록이라 보면 되겠다. 문장 2는,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닌 다른 걸 바치겠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가 바치는 것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가 바치는 것은 “지식cognizione”이다. 15, 16세기 유럽에서 지식을 가진 자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마키아벨리(1469-1527)가 죽은 지 10년쯤 후에 태어난 이이李珥(1537-1584)는 “옛날 법도를 사모”하는 것이 “공론장公論場”에서 일하는 이의 당연한 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참조하면 마키아벨리의 선물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바치는 지식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최근의 정세와 관련된 오랜 경험lunga esperienzia”l과 “고대에 대한 꾸준한 학습continua lezione”을 결합하여 가지게 된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la cognizione delle azioni delli uomini grandi”이다. 그는 이 지식을 “작은 책자piccolo volume”에 담아 전하려고 한다. 이 ‘작은 책자’가 바로 ‘군주국에 관하여’라는 이 책이다. 그는 왜 이것은 ‘작은 책자’라 했을까? 그저 물리적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아니면 《로마사 논고》라는,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은 연관 저작에 비하여 적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까, 아니면 양이나 규모가 적지만 내용은 대단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첫 문단에서 2개의 문장으로 자신이 군주에게 바치는 선물의 내용을 설명한 마키아벨리는 이어지는 문단에서 그 선물을 만든 방식과 자신이 취한 관점을 설명한다. 둘째 문단의 둘째 문장은 자신의 책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꾸미지 않았음을 밝힌다. 전통적 수사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글을 쓴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이어지는 문장에 있다. 그는 자신이 “낮고 미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uomo di basso et infimo stato”이라 말하고 나서 이런 사람이 군주의 통치라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한다고 하여 건방지다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시민”과 “군주”가 각각의 “본성”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로의 입장에 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무례함을 옹호한다. 피렌체 시민popolo은 메디치 가의 사람들과 다른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피렌체라는 상업도시국가의 주권자들이다. 신민臣民이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키아벨리가 스스로 ‘낮고 미천한 지위’에 있다고 말한 것은 그저 과장된 수사법일 뿐이다. 이것이 과장 또는 거짓임은 마지막 문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지막 문단, 즉 여섯째 일곱째 문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선물을 받아들여 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헤아려 달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간절한 청탁이다. 과연 그럴까? 여섯째 문장을 보자. “이 책을 부지런히 숙고하고 읽으면… 행운fortuna”과 “자질qualità”이 약속하는 “위대함grandezza”에 이를 수 있다. 로렌초에게는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니 이 책을 읽어야 하고, 거기에 행운이 덧붙여져야 위대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헌정사 마지막 문장에서 자신의 처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앞의 자신만만함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배열로 여겨진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이 헌정사의 전반적 기조는 ‘오만함hybris’이다.
남은 물음: 자질이 있고, 독서를 열심히 하고, 행운이 찾아오면 위대한 군주, 즉 비르투virtù를 가진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면 될까? 어렵다! 체제regime는 무형의 이념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공화주의를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로써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는 짝을 이루는 텍스트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