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은 조국을 향해 침 뱉는 자, 프란츠 요셉 무라우의 기나긴 독백”
“두 작가 모두 자신의 조국에 대한 증오를 문학적 미학으로 승화”
우리는 하나의 나라에 들어선다. 여권과 비자, 비행기표 없는 여행의 상태에 머문다. 정신의 비둘기를 허공에 풀어 놓으면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광장과 집들과 거리와 비둘기들을 구경한다. 비둘기들의 언어는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말소리가 들린다. 인적이 없는 곳에도 삶은 고여 있다. 이국의 커피 냄새. 낯선 언어와 이름들. 어느덧 우리는 집에 머무는 채로 알게 된다, 문장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골목길들. 나는 하나의 나라를 만났다. 그 무엇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것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의도하지 않았던 발견이자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외국의 한 나라를 무대로 한 소설의 경우 대개는 관광안내서나 사실적인 여행기와는 달리 작가 자신의,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주관적인 눈을 통해서 바라본 그 나라의 모습이 배경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는 소설에 나타난 어느 나라의 모습을 단어 그 자체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단 한번도 가보지 못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가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고, 관광객의 언어와 관광객의 발걸음 이상으로는 접할 기회가 없어 보이는 한 나라에 관한 소설을 우연히 읽게 된다면 자신이 읽은 작품의 인상이 오랫동안 살아남으며 실제의 이미지를 능가해버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에게는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오스트리아이다.
엘프리데 옐리넥의 『욕망』은 나에게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의 인상을 선명하게 문학의 언어로 각인시켜준 최초의 독서 경험이었다. 물론 그 전에 페터 한트케를 읽기는 했으나, 한트케의 글에서는 그가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점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었다. 실험적인 방식의 시와는 달리 한트케의 소설은 비교적 분위기가 톤 다운 되어 있으며, 등장인물이나 행위도 국적이나 민족의 특성이 강조되기보다는 현대 도시인의 일반적인 초상에 가깝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독일(어)문학이라고 말할 때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어권 스위스의 작품도 자연스럽게 포함되는데, 보통의 문학 독자로서는 굳이 그들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책을 읽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옐리넥의 경우는 달랐다. 나는 『욕망』을 감동으로 전율하면서 읽었는데, 독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에 퍼부어대는 독살스러운 저주의 악담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뇌수를 찌르는 문학의 표독함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일년 뒤 나는 알타이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아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몇 달 뒤 나는 마리아를 방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갔다. 빈의 서부역에서 전차를 집어탄 나는, 흐릿한 전차의 불빛 아래 앉아 있는 승객들의 피곤한 얼굴위로, 내가 아는 오스트리아, 내가 옐리넥의 책에서 읽은 오스트리아의 인상이 너무나 강하게 오버랩되는 기분을 느꼈고, 스스로 당황했다. 이미 몇 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빈을 방문했을 때, 빈은 중부유럽의 수많은 아름다운 도시들 중의 하나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빈은 미칠 듯이 강열하게 옐리넥의 문장들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무대가 되어있었고, 빈의 평범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모두 옐리넥이 묘사한 소시민이 되어 장바구니와 지갑을 움켜쥔 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다발로(왜냐하면 그들을 개별적으로 셀 수는 없으니까) 묶어놓는 고무줄…”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어야만 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은 옐리넥 이후 내가 두 번째로 (국가적인) 배경을 의식하면서 읽은 오스트리아 문학작품이다. 옐리넥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를 놀랄 만큼 직접적으로, 놀랄 만큼 자유롭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의 형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특징은, 6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원작인데도 단락 나누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점, 전체가 주인공 무라우의 모놀로그로 이루어진다는 점, 일면 단조로운 듯이 보이는 표현을 고집스럽게 계속 반복한다는 점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무라우는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볼프스엑을 떠나 로마에서 살고 있다. 그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위해 볼프스엑에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라서, 이제는 다시 지겨운 볼프스엑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하는 중인데 부모님과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독일어를 배우는 이탈리아 제자 감베티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이 얼마나 볼프스엑과 가족을 혐오하는지 자전적인 독백을 길게 털어놓는다. 그는 부모, 특히 어머니를 증오하는데, 어머니는 정신세계가 황량한 물질주의자 속물이며 불프스엑의 부를 겉치장에만 이용할줄 알고 맹목적인 카톨릭과 나치즘의 신봉자라는 이유에서이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들처럼 소시민정신으로 무장한 삶을 선택하는 대신, 볼프스엑을 박차고 떠나간 무라우를 부러워하면서 증오하거나 경멸할 뿐이다. 그의 가족들의 삶은 조국 오스트리아 전체의 인상과 부합한다. 재래적인 편견에 대책없이 사로잡히고, 가톨릭에 찌들었으며 나치즘 앞에서 비굴하고, 동시에 약자들에게는 거들먹거리면서 오만하고, 정신적으로 앙상하고, 마음은 한없이 옹졸한. 집으로 간 무라우는 그토록 싫어한 볼프스엑의 상속자가 되어 장례를 치른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나치 전력이 있는 부모님의 행위를 속죄하는 의미로 전 재산을 이스라엘의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소멸』이란 이름의 책을 쓰고 난 후 사망한다. 이런 식으로 하여 그는 자신의 집안과 혈통을 완전히 “소멸” 시켰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책은 조국을 향해 침 뱉는 자, 프란츠 요셉 무라우의 기나긴 독백이다.
나 자신은 감명 깊게 읽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기꺼이 권하기 어려운 그런 책들이 있다. 나에게는 『소멸』이 그건 류에 해당한다. 일단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다(한국어 번역판 508페이지). 지금은 문학을 “탐구”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또한 이 작품은 전형적인 “모놀로그 문학”으로, 스토리, 혹은 전통적인 스토리 진행 방식을 무시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특히 무라우가 감베티에게 하는 말의 경우, 문장들도 상당히 길다. 그러므로 문학을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소화하기 힘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점이 가장 중요한데, 베른하르트 특유의 관념적 과장과 집요한 편중을 이해하고 즐길 수 없는 독자에게 이 책은 동의할 수 없는 아집을 늘어놓는 지루한 모노톤의 반복에 불과하게 보일 것이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의 언어에 관한한 기본적으로 “언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어라는 말은 작가에게 고향이란 말보다 천배쯤 더 중요할지도 모르며, 진짜 작가는 이름이 아닌 문장과 서술방식의 뛰어남에 그 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 예리한 시각이 밑바탕이 된 비범한 비유와 수사, 시적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남다른 문장들의 창조자. 섬세한 은유와 뛰어난 묘사에 바쳐진 작가의 온 정신. 그러나 나는 종종 훌륭한 언어주의자(혹은 언어주의자처럼 보이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감동보다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옐리넥이나 베른하르트를 읽기 전까지 그 아쉬움의 정체는 나 스스로에게도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었다. 물론 독서와 문학에 대한 개인적 취향의 결과일 테니 굳이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다.
자신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풍부하면서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려내는 데 치중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내용이 아니라)언어와 진술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이 현실과 “다른”것은 아니고,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별개의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자의 언어가 실제의 사물에 예술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창조적으로 복무한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의 언어는 실제 자체를 예술적으로 창조해낸다는 인상을 받는다. 묘사와 서술의 경계를 열고 마침내 독자를 객관적인 실제에서 주관적인 실제로 이끌 줄 아는 언어, 실제와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를 균열시키거나 지배하는 언어. 내가 책을 읽으며 전율에 가까운 감정을 갖는 것은 항상 이런 후자의 경우였다. 그리고 나에게 엘프리데 옐리넥과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거기에 속한다.
그 두 작가가 모두 자신의 조국에 대한 증오를 문학적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은 매우 시니컬한 우연이다. 문학은 인간의 고귀한 감정, 즉 관용과 휴머니즘, 그리고 사랑에서 나온다는 교과서적인 믿음을 비껴간다. 훌륭한 문학은 감정을 적당히 절제하고 균형과 조화미를 갖추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교리도 완전히 무시한다. 이 책 『소멸』 을 읽는 내내 나는 “어떤 독서는 행복한 투쟁이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간혹 바로크적 과장으로 가득 찬 예외적인 독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것들은 나의 실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그것을 허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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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배수아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서 "신인작가 작품공모"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오가면서 글을 썼던 그녀는 간섭받지 않고 글에 몰두해 보기 위해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3~4개월씩 체류하면서 작품을 써 왔으며, 그 곳에서 발견한 작가 야콥 하인의 첫 번째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번역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그 사람의 첫사랑』, 『붉은 손 클럽』, 『철수』, 『이바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등을 펴냈다.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단편 「무종」으로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