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의 사회생물학, 라이트의 진화심리학”
9?11 테러가 남긴 파장은 컸다. 헛된 광신이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고 분노하며 일단의 지성인들이 전면적인 종교 비판에 돌입한 것도 9?11의 한 여파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 김영사), 진보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알마), 신경철학자 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동녘사이언스), 인지 철학자 다니엘 데닛 (『마법 깨뜨리기』, 동녘사이언스 출간예정) 등의 ‘새로운 무신론자(New Atheist)’들이 최근 잇달아 내놓은 책들은 종교가 그간 누려온 특권을 과학과 이성의 칼날로 낱낱이 해체하여 전 세계 지성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이 큰 관심을 끌었다.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 누군가 들어선다. 과학저술가 로버트 라이트다. 그는 진화심리학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다. 라이트가 1994년에 낸 저서 『도덕적 동물: 우리는 왜 현재의 우리로서 존재하는가』(2003년 사이언스북스 번역 출간)은 당시 막 걸음마를 내디딘 진화심리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학계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행동생태학(혹은 사회생물학)을 대중에게 소개했다면,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은 진화심리학을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오늘날 소장 진화심리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도덕적 동물』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진화심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이들이다.
라이트의 이런 전력을 생각하면, 그가 새로 내놓은 『신의 진화』는 아마도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가차없이 비판하는 책일 것 같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진화심리학자인 필자 입장에서 말하면, 라이트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란다. 그렇다고 그가 갑자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숭배하는 유일신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과학을 신 앞에 무릎 꿇리려는 것은 아니다. 라이트는 『신의 진화』에서 과학과 종교 양편 모두에게서 환영 받거나, 아니면 모두에게서 빈축을 살 듯한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펼친다.
첫째,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며, 이 관념은 수렵채집 사회의 괴팍한 원시적 신들로부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는 유일신으로 변화하였다. 예컨대 어느 수렵채집족의 신은 사람들이 개의 교미 장면을 구경하거나 폭풍우 속에서 한가하게 머리를 빗으면 분노한다. 기원전 2천 년 무렵 아브라함의 신 야훼도 처음에는 이스라엘인들이 믿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제로섬의 논리에 따라 다른 모든 민족들을 징벌과 앙갚음의 대상으로 인식하던 이스라엘의 민족신은 넌제로섬의 논리에 따라 관용과 화합을 설파하는 전 세계인의 신으로 성장했다. 둘째, 신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 이처럼 일관된 도덕적 방향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어떤 “더 높은 목적”이 우주 전체에 실제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굴곡은 있었지만 수천 년에 걸쳐 끈질기게 확장되어 온 도덕적 질서의 원천을 “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음을 선뜻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탁월한 글솜씨를 지닌 저널리스트이며 이는 『신의 진화』에서도 확인된다. 종교학,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게임 이론, 진화심리학의 방대한 지식들을 매끄럽고 힘있게 연결시키며 자신의 논제를 전개해 나간다. 라이트에게 동의하건 안 하건, 이 책은 독자에게 커다란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안타깝게도, 필자 역시 라이트의 전작들을 읽으며 진화심리학자의 꿈을 키운 경우이지만 그가 이 책에서 펼치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종교계, 과학계 모두에게 환영 받거나 빈축 사거나”
어떻게 신이라는 환영(幻影)이 도덕적으로 성장해왔다는 사실이 “더 높은 목적”이 존재함을 시사하는 증거가 된다는 걸까? 물론 개들이 짝짓기하는 광경을 우리가 좀 쳐다봤다고 화를 버럭 내는 신보다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장 44절)고 가르치는 신이 더 도덕적이다. 라이트는 다른 신을 “질투하고” 에덴동산을 “걸어 다니는” 신인동형의 인격적 신으로부터 우주를 창조했지만 일일이 관리하지는 않는 초월적인 신으로 우리의 신 관념이 이행했다고 역설한다. 라이트의 희망과 달리, 우리 주위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신이 인격적인 신이라고 믿는다. 내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신께 기도로써 알려 드리지 않으면 신은 내 고민을 알지 못한다. 신은 낙태나 동성애 같은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가차없이 징벌을 내리신다(보편적인 관용과 사랑은 잠시 접어두시고?). 요컨대, 라이트가 말하는 신의 성장은 오직 경전의 글귀에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현대인이 실제로 생각하는 신의 형상에는 원시적인 애니미즘의 신, 타민족을 저주하는 편협한 유일신, 전 세계 민족을 포용하는 유일신 등이 여전히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이라는 관념이 도덕적으로 성장했다는 전제를 일단 받아들인다 해도, 이는 “더 높은 목적”이 실재함을 입증하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신의 관념이 도덕적으로 성장했다는 전제로부터 도덕적 질서의 원천으로서의 “신”을 추론할 수 있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신 관념의 도덕적 성장은 “더 높은 목적” 혹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라이트의 “설명”이 실은 진정한 인과적 설명이 아님을 지적할 것이다.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역사적으로 진보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우주 저 너머에 존재하는 궁극적 근원으로서의 “신”을 끌어들이는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적인 “신”은 처음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도 아울러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 라이트가 게임 이론과 진화심리학을 동원해 조심스레 제안하는, 도덕적 질서의 원천으로서의 신 존재 추론은 아마도 과학자와 종교인 양측으로부터 반발을 살 것 같다. 기도에 응답해주지도 않고 적을 응징해주지도 않는 신, 우주 전체를 통제하지만 인간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신은 무가치하다고 종교인들은 생각할 것이다. 신이라는 환영이 설혹 도덕적으로 진보해 왔다 하더라도, 이를 설명하고자 “더 높은 목적”을 난데없이 가정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고 과학자들은 반박할 것이다. 과학으로 종교를 구원하기란 이처럼 어렵다. (*)
이 책에서 나는 “신”이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 우선 인류 역사를 주름잡은 신들, 즉 비의 신, 전쟁의 신, 창조의 신, 전능한 신(아브라함 종교의 신처럼) 등이 있다. 이러한 신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아마도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실재하는 신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 왔다. 이러한 전망은 도덕적 질서의 명백한 실재에 의해 제기됐다. 굴곡은 있었지만 수천 년에 걸쳐 끈질기게 확장된 인간의 도덕적 상상력, 그리고 사회질서의 지속적인 유지가 도덕적 상상력의 추가 확장과 도덕적 진리를 향한 움직임에 달렸다는 사실에 의해서 말이다. 나는 도덕적 질서의 실재가 어떤 의미에서 인류가 “더 높은 목적”을 지니고 있을 거란 짐작을 타당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더 높은 목적의 원천, 도덕적 질서의 원천은 “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무엇일지 모른다. 적어도 “신”이라는 단어의 일부 의미를 고려할 때 그렇다.
(579쪽, 맺는말 「그런데 신이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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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전중환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과의 데이비드 버스 교수 연구실에서 진화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족들 사이의 협동과 갈등, 먼 친족에 대한 이타적 행동, 근친상간이나 문란한 성관계에 대한 혐오 감정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화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인간 본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