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Balkan’은 불가리아 중부에서 세르비아 동부 사이에 걸쳐있는 산맥을 가리킨다. 발칸 산맥에서 아드리아 해, 이오니아 해, 에게 해, 마르마라 해, 흑해에 이르는 지역을 발칸 반도라 부른다. 여기에는 희랍, 알바니아, 불가리아, ‘유럽의 터키’가 포함되며, 루마니아가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발칸은 지리적 개념이지만, 그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는 다른 뜻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아니, “애초부터 발칸이란 말에는 지리적 개념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지역을 가리키던〕 이전 명칭들과는 달리 발칸에는 폭력, 야만, 원시성과 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발칸화’는 오늘날 국제정치학에서 각주 등을 통해 보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술어이다. 이를테면 사카이 데쓰야의 《근대일본의 국제질서론》(연암서가, 2010)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된 뒤 새로 채용된 민족자결원칙은 유럽 대륙 전체의 발칸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찢긴 분열의 상태를 가리킨다. 마조워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많은 서구 옹호자가 소망한 대로, 과연 발칸 민족들은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서로 간의 질시와 내분에 시달리는, 자생력이 없고 하잘 것 없는 나라들의 집합체가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민족국가들이 무제한으로 확산하는 것을 반대한 자들이 우려한 ‘분립된 작은 국가집단Kleinstaaterei’의 모습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품었던 민족자결이라는 행복한 이상이, 산산조각 난 불안정한 현실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신생국들의 경우 19세기 민족주의가 노후한 소국小國들을 더 크고 합리적인 경제통합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으나, 발칸의 경우는 그것이 반대의 경우로 나타났다.”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발칸 사람들은 마을을 중심으로 살았다. “발칸의 마을들은 수 세기 동안 주요한 정치, 행정, 재정, 군사적 단위로 농촌 주민들의 집단적 삶을 구성해왔다. 발칸 인들에게 ‘조국’은 곧 ‘마을’이었으며, 마을의 대표는 국가의 고위인사나 타인들 앞에서 주민을 대신해 발언하는 대변자였다.” 이렇게 살아가던, 오스만 제국 치하의 발칸 인들에게는 민족적 구분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는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전의 세계”였다. “술탄의 신민들의 의식은 현대국가가 국가의 정체성을 전파하는 주요 도구로 사용한 두 가지 제도, 즉 학교와 군대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형성되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의 종교로 결합되어 있지도 않았다. 오스만 정부가 발칸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 시도하기는 했으나 “코란에 근거한 종교적 반대”가 일어나 무산되었다. 오히려 발칸에서는 모든 종교가 모든 이들에게 존중되었다. 그것은 “공유자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모스크와 (성소를 뜻하는) 테케tekkes에서 부적 혹은 거룩한 땅을 채집하며 무슬림의 지혜를 이용했다… 무슬림들도 기독교 성직자, 유대인 랍비 등 누구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질문에 마케도니아의 농부들은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답”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종교는 일종의 “보험의 형태”로 변질되기는 하지만 종교적 차이를 이유로 살육을 벌이게 하지는 않는다. 무슬림과 기독교는 그들의 생활 세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한 불가리아인 — 기독교인이다 — 이 1870년 당시의 삶을 묘사한 기록을 보자: “투르크인과 불가리아인은 사이좋게 지냈다… 우리는 불가리아식으로 살았고, 불가리아 의복을 입었으며, 불가리아 관습과 불가리아 신앙을 믿었다. 투르크인들도 물론 그들 방식대로 살면서 그들 의복을 입었고, 그들 관습과 신앙을 지켜갔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물의 이치로 받아들였다.”
1922년에 오스만 제국 말기를 목격한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썼다: “(민족주의 원칙에 대한) 서구의 방법을 도입한 것이 결국 이 민족들에 학살을 초래한 것이다… 이 같은 학살은 단지, 서구의 그러한 치명적 사상에 선동되어 서로 간에 없어서는 안될 이웃들 간에 벌인 극단적 형태의 민족적 투쟁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투쟁은 1941년 나치 점령 이후에는 절멸적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1870년 당시의 ‘사물의 이치’는 종교, 민족의 구별을 따지지 않고 그것으로서 정체성의 식별 표지를 삼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었다. 민족성을 따지고 종교를 문제 삼기 시작하면 이 이치는 다른 이치로 변하여 억압기제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염려했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1853년에 이렇게 경고했다: “민족성의 구분에 따라 국가를 새로 건설하려는 것은 그 모든 유토피아적 환상 중에서도 가장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은 역사를 중단시키는 행위이고, 그것을 유럽의 어느 곳에서라도 실행하는 것은 국가 간의 견고한 질서 체계를 기반부터 뒤흔들어, 유럽 대륙을 파괴와 혼란으로 몰아넣는 행위다.”
20세기의 발칸은 ‘발칸’이라는 말에서 불러일으키는 모든 부정적 의미를 온전히 현실화한 역사를 썼으나 21세기의 발칸에서는 민족성이나 종교에 따른 식별이 사물의 이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곳의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영토 확장과 민족의 영광에 이끌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이제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투쟁도 벌이지 않는다. 오늘날 “발칸의 가장 큰 위협은 국제경제로부터” 온다.
2015년 7월 현재 발칸 지역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언론의 경제면에 기입된다. ‘그렉시트Grexit’라는, 희랍의 유로존 이탈을 의미하는 낯선 단어를 보게 되어, 민족성과 종교적 식별 이전의 시대에서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민국가 시대를 거쳐,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를 지나 이른바 ‘글로벌화된 경제’의 시대를 경과하고 있는 발칸의 역사를 일별하게 되었다. 발칸의 역사를 읽는다고 해서 한반도는, 그리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어느 ‘존’으로부터 이탈할 것인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읽어야 알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게 있다. 한국인들은 민족, 종교, 국가 등을 자연스러운 식별 표지로 간주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체제를 이루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대체로 한반도라는 제한된 — ‘좁다’는 뜻이 아니다 —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단일한 종교적 심성과 통일된 국가에서, 분열과 이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 없이 즉자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이질적인 것이 뒤섞일 틈이 없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있었다 해도 그것을 기어이 구별해내고야 마는 의지를 가졌던 만큼, 낯선 것들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상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요소들을 단 하나라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편안해하지 않는다. 발칸의 역사는 그러한 정체성 식별의 노력이 20세기를 거치면서 결국 무엇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