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카스퍼’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열여섯 살쯤 되었다. 그 아이가 길들인 매 이름은 ‘케스’. 빌리는 집과 일터와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는다. 그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케스다. 집에서는 밥도 챙겨주지 않고 밤마다 남자를 만나러 놀러 다니는 어머니와, 빌리가 먹을 것까지 먹어버리고 늘 주먹질을 해대는 배다른 형이 있다. 빌리는 어머니가 진 빚을 갚으려고 이른 아침에 신문과 잡지를 돌린다. 그 일터의 사장은 빌리가 가난한 동네에 산다고 깔보고 못미더워 한다. 학교에선, 빌리가 몸이 작고 느리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들이나 만나고 가난하다며 놀리고 때린다. 아침마다 신문을 나르느라 잠이 모자란 빌리가 학교에서 졸기라도 하면 선생들은 앞뒤 얘기도 듣지 않고 매질을 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사주지 않은 체육복 때문에 선생에게 맞고, 하기 싫은 축구에서 졌다고 뺨을 맞고 추운 날 찬물에 억지로 몸을 씻어야 한다.
빌리도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케스는 새둥지에서 훔쳤다. 배다른 형이 힘들게 탄광 일을 하며 경마하려고 모아둔 돈을 써 버린다. 아침에 신문을 나르며 우유도 훔쳐 먹었다. 신문을 대주는 곳에서 초콜릿도 훔쳐 먹는다. 매를 길들이는 법을 알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가 없자 책방에서 책을 훔친다. 그런데 빌리가 나쁜 짓 하는 것을 욕만 할 수가 없다. 아니, 아이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다.
사람들은 빌리가 케스를 길들인 것을 보고 놀라고 부러워한다. 어쩌면 빌리는 케스를 길들이지 않았다. 물론 케스는 빌리 손등에서 먹이를 먹고, 발목에 매단 실이 없어도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빌리에게로 돌아온다. 이렇게 하려면 아주 오랫동안 매와 가까이 지내야 하고 길들이려고 애를 써야 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는 언제나 다시 빌리 품을 떠나 자연으로 날아간다. 다시 말해 빌리가 숨 막히는 삶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매가 가지고 있는 이런 속성 때문이다. 매는 다른 새들과 다르게 꼿꼿하며 날쌔다. 바로 이것이 빌리가 갖고 싶은 마음이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빌리는 집을 나서서 들길 산길을 걸으며 눈 가까이 보이는 온갖 목숨들에게 정을 준다. 들에 핀 꽃과 나무들, 작은 벌레들, 하늘에 나는 새들을 보면서 마음 밭에 따뜻한 씨앗을 품는다. 빌리가 살아갈 힘은 바로 이렇게 자연이 주는 포근함에서 나온다. 집에서 어머니와 형에게 구박을 받고, 일터에서 사장에게 욕을 먹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과 주먹질을 당하고 선생에게 온갖 모욕과 매질을 당해도, 매를 돌보며 매와 함께 들에 나가면 모든 것이 풀리고 끝없이 자유를 느낀다.
빌리가 마음을 주는 사람은 둘이다. 학교 선생인 파아딩과 집을 나간 아버지다. 파아딩 선생은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알리는 말을 하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빌리는 말을 하지 않다가 파아딩 선생이 부드럽게 말을 이끌자 입을 연다. 빌리는 매를 길들이는 얘기를 술술 하게 되고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과 선생은 넋이 나간 눈으로 빌리를 바라본다. 파아딩 선생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빌리가 들판에서 매를 날리는 모습을 본다. 파이딩 선생은 빌리가 매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빌리가 가진,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낀다. 빌리도 그런 파아딩 선생에게 학교 선생들이 아이들 아픔은 들어주지 않으면서 폭력을 써서 아이들을 다스리려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이렇게 선생과 학생이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나누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아이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아픔을 감싸주고 그것을 자기 아픔을 가져오는 선생이 그립다.
빌리 마음에 아프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외간 남자랑 집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고 바로 집을 나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배다른 형이 죽인 케스를 땅에 묻어 주려고 마구 달리면서 빌리 마음속에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갔던 영화관이 눈에 보이듯이 떠오른다. 빌리는 아버지와 영화를 보고 길을 걸으며 맛있는 것을 먹고 웃고 떠들었다.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빌리는 케스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아버지와 마음껏 놀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빌리 마음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살아 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빌리와 영화를 보고 과자를 먹으며 웃는 날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글쓴이는 그날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케스’라는 매와 파아딩 선생을 곁에 두었다. 이제 케스는 하늘나라로 갔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처럼. 케스가 없는 빌리는 무척 힘들게 살리라. 어떻게 해야 케스를 잊고 아버지를 잊고 빌리는 힘차게 살 수 있을까. 빌리는 찾아내리라. 그것이 케스와 같은 새일 수도 있고 파아딩 같은 선생일 수도 있다. 아무튼 빌리는 자연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으리라.
요즘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이 폭력을 일삼는다고 난리다.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한쪽으로 몰아넣고 교육을 시키겠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에게 있지 않고 어른들과 이 사회에 있다. 아이들을 끝없이 경쟁으로 내몰고 오로지 영어 수학만을 잘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진다. 따로 가두어 두고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이들을 경제성장만을 외치며 죽음으로 내모는 교육 정책을 펴고 있는 교육 관료, 아이들을 점수 기계로 만드는 선생, 아이들에게 학력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들이다.
사람이 살면서 사람에게 당했던 아픔을 고치려면 그 아픔을 감싸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파아딩 선생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렵다. 자연이 그 아픔을 고칠 수 있다. 빌리가 힘든 삶을 살면서도 꿋꿋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연이 빌리를 따뜻하게 품어주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빌리가 자연에서 자유를 느꼈듯,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놀면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엄숙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날이 와야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고 스스로 살아 있음을 기뻐한다.
이 책은 그런 깨달음을 준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썼던 ‘월든’처럼 한 번 읽으면 좀 따분하다가도 두 번 읽으면 한 번 더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