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없고 작가의 죽음만이 있는 텍스트”
헬레네 헤게만은 2010년 독일문단의 최고 이슈였다. 『아홀로틀 로드킬』이란 낯선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문단 관계자들은 보헤미안 천재 소녀가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16세 소녀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탁월한 언어 구사, 장황한 언어를 통해 세계의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 (반)성장의 고통을 전위적인 스타일로 표현해내는 아방가르드적 야심과 그 야심까지도 조롱하는 듯한 고통에 찬 유머. 이 책은 새로운 것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두렵다는 건, 뭔가 거기에 있긴 하나 그것이 뭔지 해독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것이리라. 막심 빌러는 이 책에 대해 “서른 살이 넘은 자라면 누구나 이 책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헤게만은 책 발간 한 달 뒤 이 책이 그랬던 것 이상으로 세상을 다시 놀라게 한다. 『아홀로틀 로드킬』(이하 『로드킬』)의 주인공 미프티의 마약중독을 기술한 부분 중 상당량이 『스트로보』를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스트로보』는 아이렌이란 청년이 실제로 베를린의 클럽에서 겪었던 마약중독 경험을 블로그에 썼던 것을 모아 발간한 소설이었다. 그 밖에도 『로드킬』이 다른 책과 음악, 영화를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져 이 책은 출간 금지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발간될 ‘운명’이었는지, 『스트로보』의 저자 아이렌은 『로드킬』이 출처를 밝히고 인용된 부분을 싣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말했고, 출판사는 그 밖의 헤게만이 사용한 모든 자료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책의 뒷부분에 차용의 출처를 밝힌 뒤 재출간했다.
책의 뒷부분에 실린 인용문의 출처는 15페이지나 된다. 아이렌의 중독경험과 관련된 생생한 문장들을 단어만 조금씩 바꿔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실망감을 금치 못할 듯하다. 이런 이유로 판권을 산 외국의 출판사들은 번역 출간을 놓고 여전히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헤게만의 책이 번역 발간된 곳은 한국뿐이다. 하지만 국내의 신문매체에서도 이 문제의 책에 대한 리뷰를 한 곳도 싣지 않았다. 오마주라는 헌정 형식으로 장면을 따오는 영화매체와는 다르게 오리지낼리티, 즉 창조성이 핵심이 되는 문학계에서는 ‘표절=범죄’이란 인식이 강력하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을 번역 출간한 국내 출판사의 블로그에 실린 인터넷 리뷰 몇 편에서도 표절문제에 집중해 이 책을 읽어야 할지 말지에 대한 의견과 결국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전부였을 뿐, 책의 내용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갈등을 느꼈는데, 표절에 따른 실망감과 동시에 얼어붙은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는 것 같은 책에 대한 놀라움이 팽팽히 맞서는 혼란 때문이었다.
독일 출판계 역시 자본주의 논리가 적용되기는 마찬가지라 책의 저자가 어리고 예쁠수록, 또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저자의 특별한 약력 (헤게만의 아버지는 독일의 유명한 희곡 작가인 칼 헤게만이며, 어머니는 타계한 무대 설치미술가이다)이 동반될수록, 그런 마케팅 포인트를 가진 작가를 포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출판사가 복잡한 저작권 문제를 일일이 해결하면서까지 무리하여 재출간하려 했던 건 상당량의 인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정말 ‘뭔가’가 있기 때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 책은 엄청난 언어들을 쏟아내면서도 말하려 하는 핵심은 놓치지 않는다. 헤게만의 깊은 사고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텍스트에서 차용해온 양이 과잉되게 많음에도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질적인 텍스트를 합쳐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공들인 바느질이 아니라 헤게만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텍스트들은 이미 헤게만의 것으로 소화되어 다른 것이 되어 나온다. 헤게만은 책과 영화, 음악과 노래가사뿐 아니라 개념미술, 티브이와 라디오의 광고 문구, 영화감독의 인터뷰, 친구와 주고받았던 이메일, 인터넷에 쓴 글에 대한 네티즌의 댓글 등 자신을 둘러싼 텍스트들을 몽땅 동원하는데, 텍스트 디제잉의 종결자가 따로 없다. 그리고 헤게만은 작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트라우마인 엄마의 죽음까지 차용한다.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지만, 자기 이야기를 변용해서 쓰는 것에 차용이라 단어를 붙인 것은 이 소설의 화자인 열여섯 살 소녀 미프티의 특별한 진술 태도 때문이다. 주인공 미프티는 자신의 고통조차 제3자를 보듯 진술한다. 연극무대에 자기 자신을 배우로 올려놓은 감독처럼. 마약을 하고, 섹스를 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리를 둔 관음의 시선처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대해 제3자로서의 주관적 느낌을 논평하고, 조각난 의식의 흐름을 통해 생각나는 대로 기술하는 식이다.
이 책의 진술은 장황하나 서사는 간단하다. 작가 헤게만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 미프티는 알코올중독자였던 엄마와 단둘이 시골에서 살다가 엄마가 자살해버린 후 아버지가 있는 베를린에 와서 배다른 언니, 오빠와 함께 살게 되는데, 마약파티에 가고, 섹스를 하는 등 며칠간에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이 책은 미프티가 쓴 일기로 보인다. 미프티는 고등학교 대신 베를린의 테크노클럽에서 마약과 섹스를 하면서 ‘사회화’된다. 택시 운전기사와 아무렇게나 섹스를 하고, 친구의 집에서 헤로인을 흡입하는 등 온종일 해롱거리면서 극도의 자학행위를 하고 다닌다.
미프티는 미프티 자신을 타자처럼 느낀다. 미프티에게는 오히려 남이 나이고, 내가 남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육체와 분열되는 의식을 자주 경험하고, 그걸 경험하려고 일부러 마약을 한다. 스스로 선택한 마약 흡입 속에서 환각과 현실이 경계 없이 뒤섞이고, 남의 텍스트와 미프티의 관념이 끝도 없이 뒤섞인다. “너무 많은 생각이 그 안에 스미어 어느 것이 자신의 본디 생각이고 어느 것이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8쪽)”다.
그런데 미프티는 왜 환각에 빠지나. 분명한 건, 미프티가 환각을 도피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거다. 분신 같았던 엄마를 잃은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마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환각의 공간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미프티가 선택한 길은 환각 속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 같다. 환각 속에서라면 모든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으니. 너와 내가 이차원의 평면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미프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다. “피폐해진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잃지 않은 채 나를 학교에 다니게 하고 짓눌림 감정으로 끌고 가는 이 사회와 그 어떤 관련도 맺지 않고 스스로를 지탱해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뿐”이다. 환각의 세계 속으로 도피하지 않는 증거라면, 그건 미프티가 일기 쓰기를 통해 환각을 고통스럽게 기술하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에서 “이 문학이란 건 고생스러울 뿐이다(1쪽)”라고 기술하듯 이 책은 메타픽션의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미프티에게 일어난 일들이 실재라기보다는 미프티의 환각을 기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매끈한 껍데기가 모든 광기의 여정 내내 진짜처럼 느껴지게 하려면 텍스트의 오류가 없어야 하고 구조가 완벽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나 자신에 대해 풀어놓는 수밖에 없다.” (71쪽)
그러니 미프티의 환각을 기술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소녀 미프티에게 들어온 모든 텍스트의 언어들이 동원되는 것으로 보인다. 미프티에게는 성장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든, 예술에 대한 자기만의 사변이든,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에 대한 절망이든 간에. 미프티는 학교 대신 테크노클럽에 다니는, “성찰의 능력을 겸비한 다른 모든 약물 중독 청소년들처럼 현실 도피 성향도 현저한 읽기 중독의 형태로 일상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17쪽)” 읽기중독 자폐 소녀다. 독학 소녀가 관계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텍스트다. 미프티의 사회화는 테크노클럽의 마약 및 섹스 중독자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수많은 독학의 텍스트들과 관계하며 나아간다. 미프티가 배우고 익히는 곳은 구글의 검색엔진이며, 닥치는 대로 접하는 영화와 책, 논문들, 아이폰 아이튠스의 음악들과, 이메일,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이며, 마약 중독자들과 직접 부딪힌 대화들에서다. 기술이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폐적 인간들은 옆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창들이 제시하는 텍스트와 함께한다. 인스피레이션이 거기서 생기고, 관념화되어 누군가를 생성시켜간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대의 성장’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미프티는 누군가의 문장을 훔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절하는 자신을 전시하듯이 말한다.
“빛이든 그늘이든, 그래 맞아, 내 영혼이 감동받는 바로 그 순간, 나의 작업과 도둑질, 두 가지 모두 정통성을 부여받는 셈이니까. 내가 그것들을 어디서 가져오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것들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한 거지.” (18쪽)
이 일기의 작가인 미프티는 다른 텍스트들을 가지고 와 엄마의 죽음과 학대를 자신의 트라우마와 섞는다. 그런데 이 섞음에는 중심과 외부가 따로 없다. 엄마가 미프티를 학대했다는 진술은 환각 속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그것이 실재 소설 속의 미프티에게 벌어진 일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엄마의 학대를 기술하는 미프티만이 실재할 뿐이다. 미프티의 환각 속에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는 사라진다. 미프티는 모든 것을 대상화해서 기술하는 신(神)적인 작가가 아니다. 미프티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여러 가지 다른 텍스트들을 가져와 섞는 중심의 존재라기보다, 자신의 경험까지 타자화되어 다양한 다른 것들의 하나로 섞여드는 대상적 존재이다. 미프티가 하는 일은 세상에 대해 자기 시각을 열심히 떠들고, 남은 시간 대부분은 버려진 자로서의 죄의식이 부른 마조히즘 기계의 역할을 열심히, 그리고 철저히 수행하는 것뿐이다.
이 일기를 쓰는 미프티란 작가는 이성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외려 미프티는 나와 남의 경계가 애초에 사라진 세계에서 사물화된, 마약이 나인지 내가 마약인지 알 수 없는 물질적인 존재이며, 나약한 한 줌의 육체일 뿐이다. 언어를 통해 세계에 닻을 내리려 하지만, 수많은 텍스트의 언어들이 고통스러운 미프티에게 들어와 분열을 가속시킬 뿐이다. 다른 텍스트의 언어가 미프티에게 들어와 미프티의 맥락 속에서 증폭되거나 패러디되어 우스꽝스럽게 변모된다. 미프티란 깔때기를 통과하면서 결국 미프티 자신의 낭만적 환각들조차 깨진다. 마치 그것이 미프티의 숨은 의도였다는 듯이.
이 소설은 사회 속에 편입되지 않겠다는 식의 성장통을 다룬 성장 드라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음악과 책뿐 아니라 수많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표들과 계급이 명시된다. 현재 독일의 티브이 광고, 슈퍼마켓 체인, 명품 옷과 구두 상표뿐 아니라 오락기계, 철도이름, 음식, 식당, 거리, 반문화에 심취한 어른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약물의 정확한 이름들 등등. 미프티는 아버지가 사는 베를린에 와서 예술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부르주와 상류층으로 편입되며, 그런 문화에서 태어난 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미프티는 엄마와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아갔던 기억이 있다. 미프티는 상류층에 속해 지적이며 문화적인 수혜를 폭포수처럼 받은 천재문학소녀지만,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고통스러운 이방인이기도 하다.
하여 결말에 이르면 미프티가 기꺼이 사용하고 속하고 이 텍스트 안으로 끌고 들어온 자본주의의 기표들, 약물들, 수많은 텍스트의 문장들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 멈춰진다. 말 그대로 ‘껍질 벗김’을 당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그 많은 장광설이 사라지고 텅 빈 무에 도착한 느낌이 든다. 격렬한 고통의 덩어리가 남아 있을 뿐인데,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이것저것을 패치워크하며 얼굴을 바꾸며 살아남는 자본주의의 변신을 조롱하듯이, 작가적 나르시시즘의 단 한 줌도 결국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이 패치워크텍스트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다다른다. 미프티가 죽은 엄마 대신으로 여겼던 알리스가 소설 속에서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좀비스의
미프티는 친구에게 자신에게 가장 은밀한 것은 ‘할머니 앨범에서 엄마가 훔쳐낸 사진들이 있던 자리’라고 말한다. 죽어버린 엄마가 훔쳐낸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있었던 빈자리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식이다. 이 텍스트에는 작가는 없고 작가의 죽음만이 있다. 남의 것을 베껴 쓰는 무력한 작가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을 통과해 무의 극단까지 나아가 텍스트에서 사라져버린 작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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