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서 ‘사귐’이나 ‘우정’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흙으로부터 유리되었기 때문”
우리 사회가 아이를 키우는 데 얼마나 불안한 곳인지를 실감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파출소라며 전화가 한 통 온 것이다. 세 명의 급우들이 우리 아이를 끌고 가 손발을 묶은 뒤 때리려는 것을 지나가는 주민의 신고로 붙잡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학생인 아이들이 마치 갱영화에서처럼 여러 명이 작당하여 한 친구의 손발까지 묶은 점도 놀라웠지만, 서울에서도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그런대로 번듯한 중산층 지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도 매우 놀라웠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장난이었다고 진술했으며, 그 어머니들은 면목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몇 번에 걸쳐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만나면서 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공격적이 되었는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우리 아이도 그랬지만 이 아이들도 단지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교선생님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로 아이들은 방과 후에도 여러 개의 학원에 다니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선행학습을 잘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런 야만적인 냉대와 무시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정작 친구들과의 우정 속에서라도 치유할 수 있을 만큼 서로 함께 놀며 충분히 사귈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짐작건대 유일한 치유방법은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아니면 다른 약한 아이들을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아이를 수시로 때리며 겁을 줬던 아이들도 그런 방법 외에는 달리 참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우리의 교육현장이 온통 성적과 경쟁에 매달리는 동안 때리는 아이나 맞는 아이나 모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상처가 깊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왜 이렇게 폭력적이 되었을까? 오랫동안 일선 교육현장에서 학생들과 부대껴온 이계삼 교사의 최근 저서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영혼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은 학생들을 모두 영혼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교육의 본질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일인데 지금까지의 교육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잡아먹게끔 맹렬하게 가르쳐 키워 세상에 내놓는” 소위 ‘식인교육’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총기사고까지 난무하는 미국학교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교육현장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극히 폭력적인 체제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원래 추구해야 할 ‘사람을 만드는 일’이란 무엇이며, 영혼을 키우는 온전한 인간 정신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한 사람의 정신이란 어떤 것일까.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운명, 그러나 이 땅에 생명붙이로 빚어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보다 힘없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 아름다움의 신비에 대한 찬탄. 이러한 정신은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길러지는가. 나는 인간 정신이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그리고 ‘힘없음’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 조건에서만 이루어지며, 이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정신이야말로 교육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33)
저자는 루쉰의 『광인일기』를 인용하며 어딘가에 한 번도 사람을 잡아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아직 있을 것이며, 이들을 구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유형의 교사는 “교실 바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사”일 수밖에 없다. 영혼을 가진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과 사귐이 교육이라면 교단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기만 하는 입장으로는 날마다 변해가는 아이들의 신비로운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과 같은 솎아내기 식의 경쟁교육은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잡아먹기 위한 생존기술만 연마하는 것이며, 이런 식의 ‘식인교육’으로는 삶의 신비에 대한 깊은 놀라움, 약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같은 온전한 인간 정신의 핵심을 도저히 길러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의 교육현장이 성적이 좋은 아이는 ‘좋은 학생’이 되고, 성적이 나쁜 아이는 ‘나쁜 학생’이 되는 마치 과거 미국의 흑백분리정책만큼이나 폭력적인 이분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마치 영혼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며, 따라서 학생들은 이런 천편일률적인 폭력적 감별법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감수성을 억압하게 된다. 저자가 힘주어 비판하는 논술고사도 이것이 “오직 상위 30퍼센트 이내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해(변별력을 얻기 위해) 도입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상위 30퍼센트의 인적 자원의 등급을 감별해내기 위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우리 교육의 목표가 변별력이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마치 살처분을 기다리는 병아리마냥 각종 다양한 감별법의 실험대상이 된 것인가? 그가 인용한 한 여고생의 시 「인생은 하루뿐」은 지금 우리 아이들이 이런 감별법 체제하에서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과목과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마친다
아직까지 나의 인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나날뿐이었으니까. (35)
아이들끼리 서로 때리고 맞는 유형의 폭력보다 더 거대한 조직적인 무형의 폭력이 교육현장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 슬프게도 사실상 지금 우리 교육의 참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사귐이나 우정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흙으로부터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땅에 뿌리내리고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다른 존재와의 사귐이나 우정 역시 생겨날 수 없다. 제도교육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현대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는 <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이란 글에서 흙의 신앙이 사라지면 우리 아이들 또한 뿌리뽑힌 삶으로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뿌리가 뽑히면 뽑힐수록 더 훌륭한 인재로 각광받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지역출신이지만 거기에 살지 않아야 뛰어난 인재로 떠받드는 게 지방 소도시에서 통용되는 인재관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지역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지역사회에 직접 공헌할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어떤 면에서는 지역사회를 착취할 가능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실상 지금의 우리 교육은 부모가 자라고 자신이 태어난 땅을 보다 빨리 떠나기 위한 기술교육인 셈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자의 지적대로 흙으로부터 유리된 아이들이 결국 “막막한 도회에서 이러 저리 떠밀리는 비정규직 전사로” 살아가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자연과의 순환적 고리가 끊긴 아이들의 감각과 정서는 곧 화석처럼 굳어지게 되고, 타인에 대해 급속도로 무관심해질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가 말했듯이 사랑은 주의집중에서 비롯된다.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품고, 다른 존재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교육 이전에 이렇듯 경제성장의 논리에 의해 붕괴되어가는 흙의 문화, 즉 농촌의 몰락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을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삶이 붕괴되어 가는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시작해 학원과 학교로, 군대와 회사로, 아파트 단지로 옮겨 다니며 일생을 마감하는, “고작 이런 근대의 악몽 속에 편입되기 위해 우리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깨부수고 경제성장을 향해 질주해왔단 말인가”라는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따라서 지금 우리사회가 처한 모든 문제의 뿌리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처럼 “아이들은 공부하다 죽으라고 하고, 부모들은 자식들 사교육비 대다가 죽으라고 하고, 교사들은 학생들 족치다가 죽으라고 하는”, 즉 모두 다 죽으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환희와 삶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저자는 병도 깊고, 슬픔도 깊지만 그러나 자신의 테두리만은 잘 보듬겠다고 다짐한다.
“세상이 깊이 병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어차피 해봐야 안될 일이라며 세상을 다 알고 있는 듯 태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똬리 튼 안락과 이기심의 그늘을 조금은 들여다본 것 같았다. 분노도 없고 슬픔도 없는 사회, 혈색은 좋지만 영혼은 죽어버린 사회, 전체를 근심하는 것은 그러므로 내 몫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구체적으로 부대끼는 한정된 시공간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230)
여기서 저자가 껴안으려는 한정된 세계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았고, 우리의 부모들이 태어난 곳, 바로 우리의 고향이다. 저자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 그곳의 아이들과 부대끼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고향의 한정된 세계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품으로 보듬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고향에서 지키려고 하는 것은 지방 소도시의 구체적인 일상의 행진이며 거기에 녹아있는 훈훈한 온기, 그것이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재잘대며 팬시점으로, 아이스크림 가게로, PC방으로 들락거린다. 음식점 배달 오토바이는 좁은 도로를 곡예하듯 질주한다. 조그만 가겟방에서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후루룩 국수를 먹는다. 한껏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는 으스대듯 걷고, 노란색 학원버스에는 조그만 꼬맹이들이 차창에 달라붙어 세상을 내다본다. 이 정겨운 모습들, 이만한 일상이라도 지켜져야 하리라,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232)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살고 있을 밀양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비록 산천은 개발로 무너지고, 어른들은 삶의 무게로 무너지고 있겠지만,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뜻을 품고 귀향한 한 젊은 청년이 있고, 그를 따르는 상처받은 아이들이 있다. 교사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국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했듯이 단지 한 사람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효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렇게 단 한 사람의 신념에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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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 영국의 낭만주의 시를 전공했다. 학문적 관심사는 산업혁명기의 영국역사와 문학, 여성, 생태 문제 등이다. 주요 번역서로는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가 있고, 현재 <한겨레>와 <녹색평론>에 다수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