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인간 삶의 여러 계기들이 사회의 관습, 법률과 제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저하게 고립된 독자적 삶은 불가능하다. 심각한 사회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평탄한 시대에는 ‘사회 속의 인간’이라는 것을 감지하기 어렵지만, 전쟁과 같은 극심한 변동기에는 다르다. 이 책의 원제는 “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떤 일본 병사의 전쟁과 전후生きて帰ってきた男―ある日本兵の戦争と戦後”이다. 이 남자는 저자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小熊謙二이다. 그는 1925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났고, 1945년 스무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그가 겪은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좁게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다. 그는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관동군에 배속되어 만주로 갔다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년간 강제노동을 하고 돌아왔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일본 전후의 불황기, 고도성장기, 버블경제시기를 겪었다. 그의 삶은 20세기 중반에서 21세기 초반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맞물리고 있다. 그의 삶의 전기적 요소는 이러한 역사적 요소와 밀착되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밀착을 보여줌으로써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빈곤층에 속했던 한 개인의 삶의 기록이 어떻게 동시에 당시의 사회사가 되는지, 더 나아가 개인과 사회·국가가 구체적인 사건과 국면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저자는 아버지의 “평범한… 삶을 기록”하였다. 격렬한 역사의 현장을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평범”이라는 말로써 규정한 것은, 그러한 삶이 사회 속의 인간에게는, 좁게는 저자의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비범한 삶은 역사를 넘어서거나 역사와 무관하거나 역사를 바꾼 삶일 것이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저자의 기록은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 빈곤과 불평등” 같은 사회적 사태들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버지의 삶은 “정책이나 외교, 물가나 소득, 사회상황” 등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 인생의 여러 시기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가 시행되었고, 그것이 생활이나 경제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어려움이나 빈곤, 혹은 불신을 초래했는지 분석”한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는 저자의 아버지처럼 하층빈민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자신을 덮쳐오는 파괴적 사회변화를 완충시킬 힘이 없으며, 애초에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어낼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당장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급급하고 자신들을 대변할 사회적 세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구마 겐지는 1925년에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1932년에 도쿄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그에 앞서 형은 1931년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보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자식을 도시로 보낸 사건이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형제의 아버지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이 도쿄로 보내진 1920년대부터 193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과 불황을 거쳐 시장 경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침투해 금융이나 무역의 국제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자면 도시의 중산시민층 대두를 촉진해 그 후 소비문화의 기원이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농촌의 급격한 인구 유출과 도시 팽창이 동시에 생겨나고 있었다… 도시와 지방의 양쪽에서 빈곤과 불안정, 양극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빈곤, 불안정, 양극화, 혁명, 전쟁 — 이것들은 추상적 어휘들이다. 이러한 어휘들로 규정되는 시기에 하층빈민에게 일어나는 사태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오구마 겐지에게는 대도시(도쿄)로 보내지는 일이 일어났다.
도쿄에 살고 있던 외조부모의 삶은 도시 하층빈민 생활의 전형이었다. 커다란 변동이 없던 이러한 삶은 “전쟁의 조짐과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으로 가는 시작점이다. 나중에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이다. 오구마 겐지의 회상에 따르면, 학교에서 천황숭배가 강화된 것도 중일전쟁 이후부터였다. 하층빈민에게는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인 1936년의 2·26사건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해 5월에 일어난 ‘아베 사다阿部定 사건’이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전쟁은 반짝 호경기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930년 쯤의 불황기에 비해 만주사변 후에는 군수경기 등으로 경제가 호전되었다.” 또한 “학력으로 승진이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구마 겐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학교 과정의 실업학교인 와세다실업에 진학하였다.
중일전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은 일상생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영향은 1937년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이어 1938년 5월에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법률로써 구체화되었다. 1939년 10월에는 가격통제령이 내려졌고, 1941년에는 쌀배급제가 실시되었다. 겐지는 “서민에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뉴스보다 이런 것들이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전쟁은 막연한 사태처럼 보이지만 일상 깊숙한 곳에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연줄이 없으면 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고, 불평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차가운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많은 상점이 폐업”했고, “노동력 재배치가 진행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생활이나 경제 실태와 동떨어진 공허한 구호나 정신주의가 횡행했다.” 미합중국과의 전쟁, 즉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일본에는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황당한 정신주의가 강요되고 있었고, 거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2년 4월 도쿄가 첫 공습을 받자 그 규모는 작았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몹시 컸다.
겐지가 와세다실업을 졸업하고 다니던 직장인 후지통신기에서도 소집이 차츰 많아졌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송별식을 했지만 1944년 후반에는 그것도 없어졌다.” 동네에서도 송별이 없어졌다. 겐지는 “그런 것은 중일전쟁 때는 했지만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없어졌다”고 말한다. “물자궁핍도 심해졌다.” 전쟁은 이제 하층빈민의 삶의 모든 국면을 파탄냈다. “당시는 관료나 고급군인이 아닌 서민에게는 연금 제도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동안에 가능한 한 저축해 노후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그런 인생 설계는 전부 파탄이 났다… 국가 자체가 파탄 나는 것 같은 엄청난 시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까지 인생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없이 사는 사람에게 국가의 파탄은 곧 삶 전체의 파멸이 된다.
태평양전쟁의 전세도 기울고 있었다. “1944년 7월에는 사이판 섬 수비대가 ‘옥쇄’했다.” 그런 와중에 겐지는 징병되어 만주로 갔다. 겐지의 눈에는 일본의 패배가 환히 보였다. 패했을 때의 피란열차에는 민간인을 태우지 않았다. 당시 만주에는 약 15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겐지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일본이 패한 객관적인 근거들을 목격하였다. 소련군은 미합중국이 원조물자로 보내준 트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소련은 독일에 졌겠구나’하고 화풀이로 포로들끼리 입을 모았다.” 미합중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이겼을 뿐만 아니라 독소전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3월에 일본으로 귀환한 겐지는 “직업을 전전하는 생활에 말려들어간다.”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는 국가의 정책과 제도, 간접적으로는 아시아와 세계 정세에 곧바로 영향을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1948년의 일본 농촌은 “고향으로 돌아온 소개자疏開者나 귀국자를 흡수할 뿐 산업 기반도 없어 노동인구 과잉상태가 되었다… 이런 과잉 노동인구와 이 시기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이른바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는 1950년대 이후로 도시로 빠져나가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노동력 공급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나중 일이고, 195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겐지는 “그냥 살아가는 데 필사적이었다.” 앞으로 고도성장 시기가 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까지의 “인생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생각”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겐지는 결핵에 걸려 요양원에 가게 되었다. 결핵에서 회복되어 요양소를 나온 것이 1957년 12월이었다. 바로 이때가 고도성장기였다. “엄청난 인구가 도쿄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도쿄는 인구과밀 상태가 되었고, 주택부족으로 거주상황이 악화되었다.” 열악한 주택에 살면서도 “고도성장은 겐지에게 이득이 되었다. 일본 사회 전체가 성장하는 가운데 우연히 새로운 사업 기회를 붙잡은 것이 겐지의 인생 후반을 결정하게 된다.” 사회가 성장하고 풍요로워지면 “아래의 아래”에 있던 이들에게도 기회가 생겨난다. 겐지가 결핵에 걸렸을 때에도 예전 같으면 그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겐지의 어머니는 그렇게 죽었다. 겐지의 큰 형도 그렇게 죽었다. 겐지의 누나도 그렇게 죽었다. 하층민의 열악한 영양상태와 도시환경이 결핵을 불러오고 치료여력이 없으므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겐지는 1950년의 생활보호법, 1951년의 결핵예방법에 따라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전망이 있으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고, 기회를 붙잡았을 때 걷거나 뛰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국민이 세상을 생각하는 “인생의 연장선”을 바꾸어 주는 사회적 장치이다.
1961년에 겐지는 36살의 나이에 32살인 히로코와 결혼하였다. 고도성장으로 서민의 구매력은 올랐고, “1965년쯤부터는 아이들의 생일에 양초를 꽂은 케이크를 먹게 되었다.” 고도성장은 서민에게 새로운 자기인식을 만들어주었다. 겐지는 ‘샐러리맨’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대기업 종신고용의 행로를 걸어온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계적으로 말하면 대기업식 고용 형태는 일본 취업자의 20퍼센트에 이른 적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이상으로 일본 사회의 ‘전형적인 인간상’ 내지는 ‘안정적인 생활상’을 만들어냈다. 겐지 같은 사람조차도 자신을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고도성장은 서민들이 세상을 생각하는 “인생의 연장선”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자아상 자체도 변화시켰다. 이제 그들은 그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작은 시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 민감함은 다른 방식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1977년에 일어난 오일쇼크로 고도성장은 막을 내렸다. 일본은 저성장사회로 진입했다. 이때 이후 겐지는 일에서 점차 손을 떼고 “1980년대부터 소소한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 등을 통해 “전쟁 체험을 계승하는 것이 ‘부전’으로 이어진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모임에서는 쇼와 일왕이 죽었을 때 “‘자숙’ 모드에 대한 항의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겐지는 직업을 전전하는 생활과 필사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은 겐지의 삶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러한 국면을 열어젖힌 이들이 일본의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일본 양심의 탄생’으로 붙이게 한 사건도 바로 이러한 정신적 자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구마 겐지는 인생의 거의 전부에 걸쳐 사회구조의 지배를 받던 사람에서 사회구조와 심성구조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비범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이 책의 독서를 마친 다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