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한 민중*
*할도르 낙스네스Halldór Laxness 『독립한 민중Sjálfstætt fólk』
책은 독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독자가 그 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늦여름 어느 날, 암 슈탓토어Am Stadttor: 성문에, 성문 앞이라는 뜻라는 책방에서도 그랬다. 책방 이름은 암 슈탓토어였지만, 사실 이 도시 사람들이 대단한 예술 작품이라 여기는 성문, 더 엄밀히 따지자면 그 성문의 잔해들은 책방에서 세 블록이나 떨어져 있다.
명랑함과 소박함, 새것과 오래된 것의 공존은 건물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드러났다. DVD와 CD가 진열된 빨간 플라스틱 선반 옆에는 만화책이 꽂힌 광택 없는 철제 선반이 있다. 그 옆 반짝이는 유리장에는 지구본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나무 선반에는 책이 나란히 꽂혀 있다. 이 책방에서는 보드게임, 문구류, 차 그리고 최근에는 초콜릿까지도 판다. 다소 어수선한 이 공간에 어둡고 육중한 계산대가 있어 중심을 잡아 주는데, 직원들은 제단이라고 부른다. 제단은 바로크 시대의 것인 듯, 앞쪽에는 화려한 말을 타고 달리며 멧돼지 떼를 쫓는 사냥꾼들과 이들을 뒤따르는 다부진 사냥개 무리가 조각되어 있다.
책방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이 이 책방에서도 울려 퍼졌다.
“좋은 책 한 권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을 한 우르젤 셰퍼는 무엇이 좋은 책을 결정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첫째, 좋은 책은 어쩔 수 없이 눈이 감길 때까지 침대에서 계속 읽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해야 한다. 둘째, 적어도 세 군데 아니 네 군데에서는 눈물이 나야 한다. 셋째, 300쪽은 넘되 380쪽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하며 넷째, 표지는 초록색이면 안 된다. 초록색 표지의 책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여러 차례 쓴 경험을 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럼요.”
3년 전부터 암 슈탓토어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자비네 그루버가 대답했다.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우르젤 셰퍼는 그걸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자비네 그루버가 책방 주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신통력을 가지고 있길 바랐다.
“세 가지 키워드를 주시면 맞는 책을 골라 드릴게요. 사랑, 영국 남부, 페이지 터너는 어떠세요?”
“저기, 혹시 콜호프 씨 계시나요?”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우르젤 셰퍼가 물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늘 잘 아시거든요. 그분은 누가 뭘 좋아하는지 늘 알고 계세요.”
“아니요, 오늘은 안 계시네요. 콜호프 씨는 이제 가끔씩만 나와요.”
“정말 아쉽네요.”
“여기, 손님을 위한 책인데요. 콘월에서 펼쳐지는 가족소설이에요. 여기 표지를 보시면 아름다운 저택과 대정원이 그려져 있어요.”
“표지가 초록색이네요.”
우르젤 셰퍼가 자비네 그루버를 비난의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진초록이라니!”
“이야기의 대부분이 던버러 백작의 아름다운 대정원에서 펼쳐지기 때문이죠. 평점도 다 좋아요.”
무거운 책방 문이 열리고 그 위에 달린 작은 구리종이 밝게 울렸다. 칼 콜호프가 우산을 접어 능숙하게 털고는 우산꽂이에 꽂았다. 칼의 시선은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는 책방을 훑으며, 고객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신간들을 찾았다. 마치 자신이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집어 들어 거친 모래를 털어 주기만을 바라는 조가비 몇 개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르젤 셰퍼가 눈에 띈 순간, 그 보물들은 갑자기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우르젤은 그동안 추천받아 읽은 소설들 속에서 자신이 반했던 모든 매력적인 남자들의 집합체라도 본 듯, 칼을 향해 애정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중 어떤 남자와도 닮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칼은 예전에는 배가 약간 나왔지만, 그 배는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숱과 떠나자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사라졌다. 일흔둘, 오늘의 그는 야위었지만, 예전에 입었던 큰 옷을 아직도 입고 다녔다. 지난번 책방 사장은 칼이 이제 탄수화물도 없는 책 속의 단어들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칼은, 그래도 영양가는 많다고 대꾸했다.
칼은 늘 투박하고 무거운 신발을 신었다. 두꺼운 검은 가죽에 밑창이 하도 튼튼해서 한평생 신어도 될 것 같은 신발이었다. 그리고 질 좋은 양말도 꼭 신었다. 그 위로는 올리브색 멜빵바지와 옷깃이 있는 같은 색의 외투를 걸쳤다.
비나 강한 햇살로부터 눈을 보호하려고 늘 창이 좁은 벙거지를 썼다. 잘 때를 빼고는 실내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있지 않으면 왠지 옷을 다 입지 않은 것처럼 허전했다. 몇십 년 전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산 안경도 모자처럼 쓰지 않은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안경 뒤에는, 늘 어두침침한 곳에서 오랫동안 독서를 한 듯한 칼의 지적인 눈이 있었다.
“셰퍼 씨, 안녕하세요. 또 뵙는군요.”
칼이 우르젤 셰퍼 쪽으로 가면서 인사했다. 우르젤 역시, 자비네 그루버한테서 벗어나 칼 쪽으로 걸어왔다.
“셰퍼 씨, 침실 탁자에 놓고 보기에 딱 좋은 걸로 제가 한 권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아우 그럼요. 지난번에 추천해 주신 책 정말 좋았거든요. 무엇보다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서로의 눈을 바라봤잖아요. 마무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키스가 더 좋았겠지만. 이 경우에는 서로를 바라본 것만으로도 만족할래요.”
“그 정도면 키스만큼이나 강렬했죠. 때론 키스보다 강렬한 눈빛도 있으니까요.”
“제 키스라면 눈빛도 이기기 힘들걸요!”
말을 내뱉는 순간 우르젤 셰퍼는 자신이 낯설게도 뻔뻔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이 책은 말이죠….”
칼이 계산대 앞에 놓인 책 더미 가운데 한 권을 집으며 말했다.
“입고되자마자 셰퍼 씨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프로방스가 배경이라 단어 하나하나에서 라벤더 향이 나죠.”
“와인색 책들이 최고예요! 키스로 마무리되나요?”
“제가 결말을 알려 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없죠!”
우르젤은 칼을 한 번 흘기고 책을 가로챘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소설을 권해 준 적은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긴장감을 칼은 절대 빼앗고 싶지 않았다.
“책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책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변해서요. 이제는 모두가 카드로만 계산하잖아요. 제가 계산대 앞에서 동전을 딱 맞게 찾아서 내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요.”
“종이책은 늘 있을 거예요, 셰퍼 씨. 어떤 것들은 더 나은 방법으로 표현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책은 생각과 이야기를 저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에요. 그 속에서는 수백 년 동안도 보존할 수 있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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