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발화
무엇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 무엇이 너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하는데 눈부셨던 여름? 사정 따위 봐주지 않던 크리스마스? 지나간 시간 속에서만 사는 사람들? 어쩔 건데 무엇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건데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해? 그럼 이보다 더 나아져? 비교돼? 문전박대가 슬프니? 사람을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을래? 잠시 기댈 수 있는 호칭이 되고 싶었는데 중요하니? 중요하지 않아
부디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말자 거기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어
아무 의미도
두렵니? 너의 파렴치한 생각이 두려워? 실은 두려웠어 며칠간 이상한 생각도 많이 했어 눈알을 뽑고 젖꼭지를 잘라냈지 희망들을 걸러 잘게 으깬 뒤 입속으로 털어 넣었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도록 꽁꽁 묶었지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도록 이상했지만, 인간다운 바람이었지 가질 수 없을 바에는…… 너를 판단하려는 말들에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이제 다 그만해 대체 무엇을 알고 지껄이는 건지
나는 주어지는 일들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 어떤 잣대로도 우리를 정의할 수 없다
그냥 너와 선베드에 누워 피부를 태우는 시간이 좋아 그냥 너와 물속에 두 발을 담그고 지는 석양을 보는 시간이 좋아 그냥 엄마가 아이를 안고 물장구를 연습시키는 시간이 좋아 그냥 수없이 올라오는 기포들이 우리의 마지막 몸부림 같아서 좋아
가시밭, 나지막이, 헤쳐 나가기
복숭아, 고스란히, 새어 나오기
연필 그림자로 아무리 그어도 밑줄은 그어지지 않아 허무하니? 문장은 이미 탄생했는데 이것이 너의 방목 너의 끝 다 연기였니? 스크린 속 장면들에 불과했니? 밤하늘에 구멍을 냈더니 줄줄 흐르는 별들아,
가을이다 가을인가 봐
번지는 빛 때문에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이 기분은
흙비
이를테면 한해살이풀이란 말이 여름 내내 걸음을 기우는 것
왜 이 길로 가느냐고 물었다 저쪽으로 가면 돌아가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는데
슈퍼를 지나 공원을 끼는 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딘 길을 걷느냐고
당신은 말없이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유를 대답할 수 없다는 듯이
푹푹 찌는 무더위에 어느덧 숨은 가쁘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동선이다 당신은 왜 이토록 나를 힘들게 하지? 나는
세탁소에 맡긴 옷들을 찾으러 나왔을 뿐인데 이봐요 당신,
나는 처음부터 산책 따위를 할 마음이 없었단 말이야
아이들은 공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푸릇한 나무들이 비자림처럼 울창했고 이제 여기선 정말
식물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저건 이름이 뭐지? 당신은 여전히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이 없었다가 슬며시 팔짱을 꼈다
팔과 몸 사이에 또 다른 팔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잠깐 놀라기도 했다
내 남은 팔은 그리할 수 없는데
사이라는 것은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구나
어느 고요한 벤치에는 육체와 멀어진
한 그림자가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여름을 열심히 걷다 보면 봄이 오나 보다
이윽고 팔짱을 낀 당신의 몸이 나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배고픔을 못 느끼고 무수한 어깨에 치이는 족족 넘어지고
더는 밝은 곳으로 향할 수 없다는 직감의 명령이었다
당신은 말이 없었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았고 당신은 단지 나를
조금 돌아가게 하는 존재, 무엇을 보라고 어디로 가라고
세탁소에 맡긴 옷들이 오염된 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신은 황급히 화단으로 나갔었다
거센 비가 들이쳐서 모든 걸 망쳤다고
여태까지 심은 것들이 다 죽고 말았다고
이상하다 밖은 유독 화창했는데
눈이 부셔서 당신 쪽을 못 볼 지경이었는데
정수리 위로 장난감 팔이 툭 떨어졌고
― 철쭉.
― 응? 아, 맞네. 철쭉.
당신은 대답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몇십 분 전의 물음을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끝까지 붙든 것이었다
내게 답을 주기 위해 꽃의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
부드러운 곡선 같은 대답을, 긴 침묵을 깨고서
나는 5월의 아름다운 철쭉을 바라보며
몸속에 스민 동시에 몸속을 벗어나려는 당신을 미워했다
서로 나빠지자고요
책임감 없는 상태로 돌아가자고요
바람이 불어도
당신이 알려준 꽃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옷을 맡겼던가 그런 일은 필요했으나
감내하지 않아도 좋았다 경계를 가르는 날씨
한쪽에는 먹구름이 잔뜩 꼈고 한쪽에는 뭉게구름이 넘실대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당신은 옆에서 걷고 있었는데
당신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아
돌아가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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