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빈곤의 정의
빈곤 개념은 세밀한 정의와 측정 과정을 거쳐 빈곤 정책에 반영된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정의와 측정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간 제기된 쟁점 중에는 정의와 측정을 아울러 개념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도 몇 가지 있다. 이 장에서는 빈곤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라는 기존의 대립적인 정의와 이 둘을 조화시키려는 대안적인 정의 방식을 검토한다.
빈곤을 정의하는 방식
빈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빈곤 개념에 관한 정치적·정책적·학술적 논쟁의 핵심이다. 정의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해법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가치 판단이 수반된다. 따라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사회과학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만큼 논란도 자주 일어난다. 단 하나의 ‘올바른’ 정의란 없다. 이제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어떤 정의든 부분적으로는 특정한 사회, 문화, 역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는 매우 다른 여러 사회의 빈곤을 비교하는 연구에서 참고할 지점이다.
넓게 보는가, 좁게 보는가
빈곤 정의는 그 범위에 따라 다양하다. 좁게는 물질적 핵심과 그 핵심의 속성에만 국한하는 경우가 있고, 넓게는 빈곤과 관련된 관계적·상징적 요소까지를 아우르는 경우도 있다. 브라이언 놀런과 크리스토퍼 웰런은 정의를 지나치게 넓게 내리면 ‘빈곤의 핵심 개념’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을 위험이 있으므로 최대한 협소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타운센드의 뒤를 이어 (최저subsistence 수준의 필요에 국한하는 ‘절대적’ 정의보다는 넓은) 사회참여 불능inability이라는 측면에서 빈곤을 정의하지만, 그 불능의 원인을 ‘자원 부족’에 둔다는 점에서 타운센드의 정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빈곤을 “삶 속에서 주로 재정 형편에 따라 소비 또는 참여를 결정하는 영역”으로 국한하는 것이다. 빈곤을 “사회참여를 포함해,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주로 물질적인 면에서 자원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태”라고 보는 영국의 주요 반빈곤 단체 조지프라운트리재단Joseph Rowntree Foundation의 정의가 이런 방식을 보여 준다.
초점을 더 넓히기 위해서 다차원적으로 빈곤을 서술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최근의 흐름을 무색케 하는 정의 방식이지만, 그러한 흐름과 절대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빈곤’으로 규정되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비빈곤’를 구별하는 것이 정의의 기능이라고 할 때, 이처럼 최대한 협소한 범위로 한정해 빈곤을 정의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이러한 정의에서는 UN에서 주로 사용하는 정의에 담긴 ‘의사결정 참여 부족’, ‘인간 존엄 침해’, ‘권력 부재’, ‘폭력 민감성’ 같은 비물질적 요소가 암묵적으로 제외된다. 빈곤층 당사자들이 중요시하는 목소리·존중·자긍심 부족, 고립, 굴욕 같은 비물질적 측면도 마찬가지다. ‘의사결정 참여 부족’, ‘폭력 민감성’, ‘굴욕’ 같은 요소는 빈곤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흑인으로 존재하거나 장애를 구조적 차별로 만드는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기와 같은 다른 상태와 결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소한 정의 방식으로는 자칫하면 빈곤 상태의 다차원성, 그리고 물질적 측면과 관계적·상징적 측면의 상호 침투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는 만큼, 이 책에서 전개하는 전반적인 빈곤 개념화와 동떨어지지 않은 선에서 빈곤을 정의해야 한다.
물질적 자원인가, 생활수준인가
측정 관련 문헌에서 사용하는 빈곤 정의가 제각기 달라지는 또 다른 이유는 기반으로 삼는 개념화가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빈곤의 개념을 잡을 때 개인이 가진 물질적 자원, 특히 소득 수준에 주목하는지, 아니면 생활수준과 사회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이 실제로 영위하는 삶의 수준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정의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스테인 링엔이 말했듯이, “첫 번째 방식에서는 생활양식way of life을 결정하는 요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빈곤을 정의하고, 두 번째 방식에서는 생활양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빈곤을 정의한다.”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방식을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살펴본 놀런과 웰런이 그랬고, 이후에 살펴볼 타운센드도 그랬다. 그러니 링엔이 이 두 방식을 결합해 ‘자원이 불충분하여 박탈 상태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저생활수준low standard of living’을 빈곤으로 정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누군가 ‘저생활수준과 저소득으로 사는 경우’에 그 사람은 ‘빈민’이라는 것이다.
토니 앳킨슨은 링엔과 비슷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빈곤 정의를 생활수준에 주목하는 방식과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자원을 누릴 권리’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각각 구별한다. 생활수준을 고려하는 방식은 여러 문헌에서 흔히 나타나며, 실증연구empirical research의 기준으로 쓰인다. 최소한의 자원을 누릴 권리에 주목하는 방식은 소득 척도상 빈곤 여부를 가르는 특정 지점을 설정하는 방식, 또는 사회부조 제도에서 규정하는 소득 수준을 바탕으로 빈곤을 측정하는 방식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권리가 빈곤 정의에 명시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전반적인 빈곤 개념화에서는 하나의 구성 요소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차원에서 사회참여의 전제 조건이라고 볼 만한’, ‘자기 몫의 최저 소득을 배분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곤을 인권과 시민권의 부정으로 개념화하는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빈곤을 이런 식으로 개념화하면 여성 빈곤을 이해하고 퇴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앳킨슨에 뒤이어 스티븐 젱킨스는 여성주의적 빈곤 개념을 ‘경제 자립을 이룰 최소한의 개인적 권리 부족’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인 밀러와 캐럴라인 글렌디닝은 권리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타인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태인 사람은 빈곤에 취약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 기반해 자립할 수 있는 개인적 역량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주의적 빈곤 정의를 내린다. 여기서 쓰인 빈곤 취약성vulnerability이라는 개념은 넉넉한 생활수준을 누리면서도 독립적인 소득은 갖지 못하는 여성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같은 맥락에서 프랜 베넷과 메리 데일리는 ‘적정 소득에 대한 통제권이 없는’ 상태를 최소한 (대체로 성별화된) 빈곤 위험 상태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또한, 이처럼 적정 소득에 대한 통제권이 없는 상태도 전반적인 재정 불안정성precarity의 한 측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빈곤에 취약하다는 것은 이른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불안정 노동계급]’ 시대에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에 대처할 재정적 자원이 부족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재정 불안정과 빈곤 취약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고통스럽게 확인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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