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공순이에서 콜순이로
여성 노동자의
흔적을 찾아
“자,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현장연구를 나서기 전 던진 첫 번째 질문이자 모든 인류학자의 큰 난제 중 하나다. 콜센터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콜센터를 찾고 여성 상담사를 만날 수 있을까?’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내 나름의 목적지는 있었다. 바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이하 디지털단지다. 196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 지역 수출산업공단의 핵심 장소였던 구로공단이 1990년대 후반부터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전환되었다. 1970, 80년대 각종 공장에서 수많은 젊은 여공이 육체노동을 했던 곳이 디지털 정보 중심의 산업단지로 바뀌면서 다수의 콜센터 업체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디지털단지는 콜센터 여성 상담사들의 현실을 과거 여성 노동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점이었다.
막막한 여정이었지만 디지털단지를 첫 목적지로 정하게 된 데에는 두편의 기사가 큰 자극이 되었다. 첫 기사는 『프레시안』에 게재된 2012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으로, 노동자 권리 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 김희서 사무국장이 사업단에 걸려온 상담 전화를 소개한 글이다. 「‘현대판 여공’들이 월 100만원에 밤샘하는 구로공단」이라는 기사의 제목처럼 예전 구로공단 시절 여공으로 일했던 중년의 여성이 지금도 디지털단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자녀가 계약직으로 2년을 근무하다가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해고된 일을 토로하며 ‘노동자의 미래’에 상담을 요청했다.
“우리 아이가 너무 힘들게 일을 하는데요. 너무 억울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고, 불쌍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는데 정규직 시켜준다고 해놓고서 근무한 지 2년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 이제 그만 나오라고 하네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 저도 독산동에서 일을 합니다. 처녀 때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일했었고, 애 키운다고 일 안 하다가 어느정도 키우고 나서 삶이 쪼들려서 다시 이곳에서 일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냥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려니 해서 일하는 거니 사대보험도 없고, 보너스도 없고, 공장 사정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일 나오라고 하고 어떤 때는 기약도 없이 갑자기 쉬라고 해도 참고 일할 수 있습니다. 한달에 80만원 받을 때도 있고, 야근도 하고 그러면 100만원 받을 때도 있고 해도 참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도 졸업하고 이제 꿈과 자기 계획도 갖고 일하려는 애들한테까지 이렇게 하는 건 절대 아니죠. 그렇지 않나요?”
또다른 기사는 2014년 9월 17일 『한겨레』에 게재된 「50년 전에는 ‘공순이’… 지금은 ‘비정규 인생’」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40여명의 노동자가 ‘50년 전에는 공순이 인생, 50년 후에는 비정규 인생’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과거 구로공단 시기 혹독했던 노동 환경이 오늘날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 기사의 주인공 역시 실제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여공이다. 연구를 진행하며 이날 시위에 참여한 오숙자씨를 이후 영화 시사회, 전시회 등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독산로107길 봉제거리’ 하청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비정규직 인생’으로 살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노동자들이 이런 시위를 한 날짜와 장소다. 2014년 9월 17일, 디지털단지 내 한국산업단지공단. 바로 박정희정부 때 시작된 구로공단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였다. 이들의 외침을 확인한 후 지금의 여성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세대 전 여공의 삶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두편의 기사 외에 객관적인 연구 결과도 한몫했다. 2013년에 금천구청에서 발간한 디지털단지 내 여성 서비스직 종사자 건강실태조사 결과를 확인한 나는 완전히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디지털단지는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1단지, 구로구 가리봉동에 2단지, 금천구 가산동에 3단지가 있는데, 2012년 디지털단지 중 3단지인 가산동을 중심으로 일곱 개 업종전자산업, 의류 제조업, 콜센터 보유 업종, 정보통신업, 의류 판매업, 건물 청소업, 음식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의 건강실태조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콜센터 상담사가 우울증 유병률 27.1%, 근골격계 질환 의심 유병률 31.3%, 흡연율 26.0%로 모든 질병에서 가장 높은 유병률을 보였다. 이런 결과의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 설문지를 돌리고 인터뷰를 진행한 연구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또 어떻게 디지털단지 내에서 상담사와 접촉할 수 있었는지 노하우도 얻고 싶었다물론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어떤 노하우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이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디지털단지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운명적이게도나는 지금도 이렇게 믿고 있다 내가 현장연구를 시작한 2014년은 구로공단 50주년이 된 해였다. 구로공단 조성의 근거법인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 제정일인 1964년 9월 14일을 기준으로 2014년 9월 14일이 정확히 50년이 되는 때였다. 갖가지 행사들이 개최되고 한국의 산업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여공들의 땀과 희생을 칭송했다.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바로 ‘수출의 여인상’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에 내려 붐비는 식당 골목길을 지나 조금만 가면 빌딩 숲 사이에 서 있는 수출의 여인상을 볼 수 있다. 2014년 새로이 색을 입히고 지금의 자리인 한국산업단지공단 건물 앞에 놓인 이 철의 여인은 오른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당시 주된 수출 분야였던 섬유산업을 상징하는 둥근 실타래를 들고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여공들이 ‘희생’한 것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고도성장과 수출 성과를 얻기까지 수많은 여성 근로자들의 헌신적인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여인상은 1970년대 당시 산업화와 수출의 역군이자 구로공단의 주인공이었던 수많은 여성 근로자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인 기상을 형상화하였습니다.
― 한국산업단지공단
여성 근로자의 열정과 헌신이라! 정말 자발적인 열정과 헌신일까. 혹은 그 같은 칭송을 발판 삼아 고위직 공무원들이 자화자찬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방』문학동네 1999은 10대 여공의 삶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10대 여공의 삶이 강요된 헌신, 혹은 어쩔 수 없는 차악의 선택 정도로 읽혔다. 소설을 읽으며 적어놓은 필드노트만 보아도 생생히 느껴진다. ‘보건체조, 산업역군, 군대 내무반, 도시로 나오니 하층민, 노조 가입 안 돼, 납 중독, 저임금, 공순이, 이런 게 바로 수치야, 시골은 자연이 상처이지만, 도시는 사람이 상처다, 남자는 아이를 떼라, 똑같은 자세로 일어난다…’ 구로공단의 주인공이라 칭송받는 여공들이 기념식 자리에 초청받지 못하고, 오히려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도시는 사람이 상처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다. 콜센터 상담사들이 마주한 현실도 이렇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이런 의문을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할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디지털단지 안에 있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내가 향한 첫 번째 필드였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그곳에서 목격한 과거
서울 지하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목적지인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으로 향했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와 조금 걷다보니 눈에 띄는 현수막이 있었다. ‘여성안심 동행 귀가 서비스.’ 어두워진 밤길을 지나가야 하는 여성 직원이 많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현수막이었다. 도로변을 빼곡하게 점령한 술집들이 왜 이런 현수막이 걸리게 되었는지를 조금은 짐작게 했다. 현수막 옆쪽에 높이 쌓인 빈 박스 더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는데, 당시 한 할머니가 열심히 그 종이박스들을 수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의 밤길이 위험한 곳, 그리고 노년 여성의 생활이 위태로운 곳.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으로 가는 길목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은 지하철역 출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2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생활체험관은 ‘가리봉상회’라는 옛 구멍가게까지 재현해놓았다. 체험관에는 다양한 사진과 옛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당시 여공들이 머물던 ‘닭장집’이라고 불린 월세방 골목 사진이 있었다. 두평도 채 안 되는 방에서 서너명씩 함께 거주하고, 그래서 한집에 무려 60여명이 머물던 곳. 닭장집 안에는 보통 비키니 옷장조립식 임시 옷장, 3단 옷장, 흑백 텔레비전, 쓰레기통 등이 있었고, 키가 1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여성 세명이 눕기에도 자리가 좁아 보였다. 그 좁디좁은 닭장집이 지금은 미로와 같은 구조를 한 주택으로 변모되었다이곳에는 현재 조선족과 이주노동자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전시된 여러 사진 중 눈길을 끈 것은 다 타고 재만 남은 연탄들이 탑을 이룬 사진이었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이 저 연탄 하나하나에 기대어 한밤의 추위를 버텼겠구나 하는 감상과 함께,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몸을 녹여주는 연탄이 쉽사리 죽음의 가스로 돌변할 수 있다는 가혹한 현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담벼락 밑 연탄재들 하나하나에는 젊음이 소진된 우울한 가슴들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체험관 안에 적힌 김사이 시인의 시 앞에 발걸음이 오래 머물렀다.
가리봉오거리 가는 공장들 담 아랜
우울한 가슴들이 다 모였다
담벼락에 달라붙어 눌은 먼지들 빈 담뱃갑
썩은 나뭇잎 비닐봉지 팔다리는 물론, 머리 없는 나무들
한겨울 매일같이 옷깃 세우고 지나다닌 길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 김사이 「초록눈」 부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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