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익숙한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아름다움
― 공공미술 이야기
빌딩 숲 사이 상큼하면서도 당당한
‘레몬색 조각’
여의도 IFC 서울 × 김병호 조각가
조용한 증식
첫인상은 활짝 핀 백합꽃의 수술 같았다. 자꾸 보니 세련된 여성을 은유하는 이미지처럼 다가왔다. 정면에서 조각물을 보면 어떨까.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루며 부채처럼 퍼지는 형태에서 바람에 확 퍼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여성이 연상되지 않는가. 흑백사진 속 그 메릴린 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레몬색이 주는 상큼함 때문에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 나온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이 조각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기에 뭘 연상하든 자유다. 먼로나 헵번은 1950~196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배우. 요즘 영화나 TV에 나오는 배우 김태리나 한소희 정도를 떠올려야겠지만 ‘올드한’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이 조각물은 2012년 8월에 완공돼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건물, IFC 서울 안에 있다. IFC 서울은 콘래드 서울 호텔과 세 개 동의 초고층 오피스타워32층, 29층, 55층로 이루어진 복합상업건축물이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국제적인 설계회사 아키텍토니카가 설계·디자인한 이 건축물은 상층부의 귀퉁이를 과감하게 잘라냄으로써 생긴 기하학적인 단면,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 덕분에 보는 방향에 따라 외관이 달리 보여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크리스털 조각품’이라 자찬해도 밉지 않다.
외국 작가가 만든 조각?
토종 작품입니다만
IFC 서울 건물들이 ‘ㄷ’자 형태로 감싼 중정의 초록 잔디 위에 놓인 이 노란 조각물은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길에 자주 보는 작품이다. 볼 때마다 당연히 외국 작가의 작품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홍익대 미대를 나온 김병호1974~ 작가의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2012년 8월 IFC 서울이 완공되기 한 해 전에 수주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38세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미술관 밖에 설치된 공공조각은 이 작품이 1호라고 했다서울 종로구 케이트윈타워에 설치된 비슷한 조각은 그해 늦게 주문받았으나 설치는 더 빨리 됐다. 삼십대 신예 작가에게 눈길을 주다니. 그런 파격은 건축주가 국내 관행에 휩쓸리지 않는 외국계여서 가능했던 일임에 틀림이 없다. 공공미술 기획사는 앞서 여러 조각가를 제안했지만, 계속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서른 번째로 내민 것이 김병호 조각가에 대한 제안서였는데, 마침내 본사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김병호 작가에 대한 제안서가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작품명 〈조용한 증식〉의 외양은 파스타 면 다발을 움켜쥐고 중간쯤에서 구부린 뒤 한쪽 끝을 부채처럼 펼친 형국이다. 꽃의 수술과 꽃잎을 합성한 느낌이기도 하고, 꽃 피는 장면을 초고속으로 촬영하여 처음과 마지막을 합친 느낌이기도 하다. 면발의 가닥 같은 파이프의 끝은 트럼펫의 나팔 모양으로 퍼졌는데, 거기서는 소리도 나온다. 뭉툭한 끝은 멀리서 보면 꽃 안쪽의 수술대 끝에 달린 볼록한 꽃밥 같기도 하다.
나는 왜 이 조각이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건축주가 외국계이니 외국 작가를 뽑았을 거라는 연상 작용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또 레몬색이 주는 싱그러움에서 서구적인 느낌을 받았다. 녹색을 띤 레몬색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개나리의 노랑이 주는 토속적인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 조각의 레몬색과 잔디의 초록색이 이루는 색면색면이라는 용어는 미술에서 색을 넓게 펴 바르는 방식을 의미의 대비는 야수주의 화가 마티스 작품처럼 경쾌했다.
서울에 설치된 공공조형물이 주는 진부함에서 벗어나 있는 점 역시 해외 작품으로 느끼게 한 요소였다. 도심의 빌딩 앞에 설치된 조각물을 관찰해보면 대부분이 인물 형상의 구상 조각이거나 엇비슷해 보이는 추상 조각이다. 또 재료도 스테인레스 아니면 돌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형식이나 재료에서 틀을 벗어나 있어 새롭고 신선했다.
조각 작품 설치를 위해 할애한 넓디넓은 면적 또한 놀랍다. ‘외국의 저명 작가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농구장 크기의 넓은 잔디밭 몇 개가 펼쳐져 있는 넓은 중정에 야외 조각물이라곤 이것 한 점뿐이다. 게다가 겨울에도 얼지 않는 수입 잔디 덕분에 사계절 내내 초록과 노랑의 대비를 감상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시내 곳곳의 공공조각물들이 받는 대우를 보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대개는 계단 옆에 옹색하게 서 있거나 화단 안에 쪼그려 앉은 듯 설치돼 있다.
김병호의 작품에 조각물을 설치하는 제단이 없다는 점도 놀랍다. 보통 조형물은 단상 위에 올라선 교장 선생님처럼 제단 위에 ‘근엄하게’ 모셔져 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따분한 것처럼 제단 위의 조각물 역시 진부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작품은 키스하듯 바로 대지와 접촉해 뿌리를 박고 있다.
설치 초기에는 점심시간이면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여의도의 청춘 남녀들이 조각물 옆에 드러누워 하늘을 구경하며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날렸다. ‘접근 금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뉴욕을 방불케 했던 그 자유분방한 모습을, 안타깝게도 지금은 볼 수 없다. 그사이 건축물 소유주가 미국계 AIG글로벌부동산에서 캐나다계 글로벌 대체투자운용사인 브룩필드자산운용으로 바뀌었고, 이곳의 잔디밭은 한국의 여느 곳처럼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잔디밭을 접근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금도 조각물 주변에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었다면 한국 공공조각 중 최고의 롤 모델이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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