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전기와 만나다
― 기원전 700년부터 서기 500년까지
에트루리아인
고대사는 흔히 조각난 이야기로 배운다. 이 장의 목표는 좀더 중요한 조각들을 추려 엮는 데 있다. 그리스인이 로마인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그리스인으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지만 나는 로마인으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일단 로마 원주민 ― 테베레강 어귀 약 37킬로미터 상류에 위치한 울퉁불퉁한 화산 지역인 라티움Latium, 그래서 그들의 언어가 ‘라틴어’가 되었다의 도시 ‘로마’에 거주하던 보잘것없는 소규모 민족 ―을 이탈리아 내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명백한 비非로마인 부족들과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은 도시는 훗날 당시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 즉 동쪽으로 오늘날의 이란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인도·중국과도 통상 관계를 맺게 된다.
비로마인 부족들 중 에트루리아인이 있다. 기원전 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단연 최강의 민족으로 꼽혔던 그들의 영토는 로마의 남쪽에 자리한 살레르노에서 북쪽으로 거의 알프스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인은 이들을 투스키족 또는 에트루스키족 지명 ‘에트루리아’와 비교이라고 불렀다. 에트루리아인은 그리스인과 상업적·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8세기부터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에트루리아는 초기 로마에 정치적·문화적특히 종교으로 분명한 영향을 끼쳤고, ‘로마Roma’라는 이름 역시 에트루리아어에서 유래했다. 로마의 초대 왕들기원전 753년 로마 건국 이후도 에트루리아에 연계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공화국 건설
로마가 강대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 출신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오만한’이라는 뜻가 축출되고 나서부터이다. 왕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로마의 귀족 여성 루크테티아를 강간해 촉발된 사건이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 1권은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능욕당한 루크레티아,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옹립하려는 에트루리아 출신 왕 라르스 포르세나를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지킨 호라티우스, 로마인들이 주변 지역에서 사비니족 여자들을 납치한 사건 등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공화정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공동 소유물, 업무, 사업’이라는 뜻이다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발전했으며, 로마의 최고 부족장들예전에는 왕의 조언자였고, 이제 원로원을 구성하는 파트리키 귀족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로마인들은 믿었다. 원로원은 새로운 최고위 선출직 관리들집정관 같은 정무관들의 자문기관이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들은 평민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로원과 평민이 완전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논평했다. 평민은 모든 로마인에게 적용되는 법을 제정하는 그들만의 민회를 갖게 되었고, 모든 정무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도 획득했다.
로마의 팽창
로마는 기원전 5세기부터 남진과 북진을 거듭하며 지역 부족들과 때로는 동맹을 맺거나 때로는 멸망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로마는 기원전 270년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 라틴어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즉 공통어가 되었다. 이 시기 로마는 놀랍게도 북아프리카의 도시 카르타고와 다양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509년당시 카르타고는 그리스와 이해관계가 있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348년, 306년, 279년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모습을 주시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주로 해상무역이나 시칠리아 같은 지역에 그리스와 에트루리아가 개입하는 것을 공동으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이 항상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기원전 390년 이탈리아 동북부에 소규모로 거주하던 갈리아족오늘날의 프랑스 지역 출신이 로마를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로마인들은 이 무시무시한 부족이 이동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곤 했다. 이탈리아의 삼니움족 역시 굴복시키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바로 이 시기에 강력한 시민군을 양성하는 동시에 로마에 패배한 부족들이 정치적·상업적사회적으로 로마 편이 되게 만들 탁월한 외교술을 발전시켰다.
‘피로스의 승리’
기원전 280년 이탈리아 동남부 깊숙이 자리한 그리스 식민도시 타렌툼은 그리스 서북부의 피로스왕에게 바다를 건너와 로마의 팽창을 함께 저지하자고 도움을 청했다. 피로스왕은 일부 성공을 거두었지만,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는 지나치게 많은 대가를 치른 승리를 가리키는 표현 ― 옮긴이가 수차례 이어지자그는 “승리가 이런 것이라면 누가 이기고 싶겠는가?”라며 한탄했다 마침내 그리스로 돌아가버렸다. 로마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신흥세력으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포에니전쟁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상대로 포에니전쟁을 치렀다. 포에니전쟁은 기원전 146년 3차에 걸쳐 치러진 뒤 비로소 끝이 났고, 로마는 이 전쟁으로 국제 무대에 진출했다. 로마군은 오늘날의 지명으로 시칠리아, 아프리카, 알바니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터키에서 전투를 치렀고, 그 결과 시칠리아, 사르데냐, 스페인, 아프리카를 첫 속주로 만들었다. 이후 로마공화정이 몰락하고 제국시대가 열린 약 200년 동안 로마의 침략행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인이 세운 정착지였다. 이 전쟁이 영어로 ‘퓨닉Punic’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그리스어 ‘포이니케스Phoinikes’를 로마인이 ‘푸니키Punici’로 음차했기 때문이다한국어 ‘포에니’는 또다른 라틴어식 표기 ‘포에니쿠스Poenicu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시칠리아 정복을 둘러싸고 일어난 1차전은 기원전 241년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번째 속주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전쟁을 통해 바다에서 경험이 풍부한 적과 싸우며 해상전투 기술을 익혔다. 제1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할 당시 로마인들은 해상전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반면, 상대편 카르타고는 양쪽에 노가 무려 5단으로 배치된 거대한 갤리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어느 날 좌초된 적선을 본떠 놀랍게도 불과 60일 만에 4단 노선 100척, 3단 노선 20척을 건조했다나중에는 45일 만에 22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제작했다!. 노잡이들은 마른땅에 긴 의자를 두고 앉아 모의 훈련을 받았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카르타고인들과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로마인들은 적선을 들이받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뾰족한 징이 박힌 건널 판을 전선에 박아 두 대가 단단히 고정되면 로마 병사들이 그 건널 판을 타고 적선으로 몰려들어가 그곳에서 바다 위 육상전을 벌이는 전술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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