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무렵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처방전을 주고
색색의 알약을 삼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는 이미
잃을 것도 없고 얻고 싶은 것도 없는
시간들을 투약한 지 오래예요
눈 내리는 밤 제설차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고양이
어떤 자책도 없이
자신의 잠을 모두 쏟아 내는
한 뼘의 경희
개의 그림자는 한낮
죽은 나무들은 이름이 없다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주 종로에 모였다
서툴게 인사를 나누며
출렁이던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움츠린 경희를 만났다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한 뼘의 경희
너는 영화를 좋아했고
롱부츠를 자주 신었고
붉은 입술이 온기로 부풀던 아이
덜 아문 상처를 서로 할퀴며
그럴 때마다 눈물이 솟아나는 게 신기해
훔치던 두 손을 모른 척하던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면
무릎을 껴안고 숨어 있는 게 안전해
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은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야
우리에겐 애인이 없고
직장이 없고 미래도 없었기에
끝내 바닥난 기분이 발목을 잡아채면
온통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게
지겨워 견딜 수 없어
젖은 속눈썹이 떨려 오면
박차고 일어서던 너의 작은 등을
우리는 대화라고 불렀다
누가 더 길어졌나 내기를 하면
누구도 한 뼘에서 더 자라지 못하던
세상에는 구름 한 조각
잠깐의 빗소리와 길어진 그림자들
한 뼘이란 큰 걸까 작은 걸까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매일 밤 그 질문에 골몰하느라
머리가 하얗게 셌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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