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렇게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되었다
1
인간의 손은 놀라운 기관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움직일 뿐 아니라 다양한 동작이 가능하다. 다른 동물도 특별하게 진화한 코, 부리, 입, 혓바닥, 발, 꼬리 같은 기관을 사용해서 신기한 재주를 보일 수 있으나 몇 가지 목적에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손처럼 다양한 목적에 따른 수많은 동작을 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인간의 손도 평소 하지 않던 동작을 무리하게 반복하면 곧 문제가 생긴다. 통증이 나타나고 뻣뻣해지며 나중에는 저리고 감각이 둔해진다. 그때 나의 손이 그랬다. 왼손으로는 10cc 주사기를 단단히 잡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주사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긴 다음 다시 엄지로 천천히 미는 동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반복하다 보니 손바닥은 저리고 뻐근했으며 엄지, 검지, 중지는 얼얼하고 감각이 둔해져 국소 마취 주사를 맞은 것만 같았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주사기의 손잡이를 뒤로 당기면 10cc 주사기에 혈액이 가득 채워졌다. 주사기가 연결된 ‘T’자 연결부의 밸브를 반대로 돌린 후 천천히 손잡이를 밀면 채워졌던 혈액이 환자에게 연결된 정맥로IV line를 타고 들어갔다.
흔히 ‘수액줄’이라 부르는 긴 정맥로는 환자의 오른쪽 쇄골 아래로 연결되어 있었다. ‘중심정맥로central line’였다. 쇄골 바로 아래 지나가는 정맥쇄골하정맥, subclavian vein을 통해 심장과 직접 연결되는 정맥로를 확보한 것인데, 패혈증 쇼크septic shock나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따위로 대량의 수액 투여와 함께 수혈이 필요할 때 시행한다. 환자의 경우는 저혈량성 쇼크였다. 저혈량성 쇼크는 문자 그대로 대량 출혈이 발생해서 혈압이 감소하는 질환인데 위궤양 출혈, 위식도 정맥류 출혈 같은 질병으로도 발생하나 외상으로 인해 복부에 피가 차는 혈복강hemoperitoneum도 원인이 될 수 있고 사지 절단 같은 심각한 외부 상처에도 나타날 수 있다.
그때 환자는 ‘외부 상처에 의한 저혈량성 쇼크’에 해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심한 안면부 개방성 골절이었는데, 개방성 골절은 부러진 뼈가 피부와 근육을 뚫고 몸 밖으로 튀어나온 것을 의미한다.
환자 주변 풍경은 섬뜩했다. 응급실에 마련된 중환자실 구역에는 건장한 체격의 환자가 누워 있었다. 의식 없이 누워 있던 환자의 입에는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기관내관 endotracheal tube, 입을 통해 환자의 기관지까지 삽입하는 관으로 기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다이 꽂혀 있고 기관내관의 끝에는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규칙적인 기계음과 함께 환자의 가슴이 들썩였다. 환자의 얼굴에는 미라처럼 거즈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는데, 미라와 달리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방성 골절과 함께 안면부 깊숙이 위치한 동맥이 손상 입은 듯, 거즈와 붕대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온 피는 베개와 시트를 적시고는 침대를 타고 바닥까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흐른 피를 계속 닦아내는 것이 불가능해서 고인 피를 흡수하기 위해 시트를 몇 개씩 덮어 두었으나 그 역시 죄다 검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파란색 인턴 근무복을 입고 어두운 표정으로 10cc 주사기를 이용해서 피를 짜 넣었다. 짜 넣은 피는 그대로 환자 안면부의 상처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혈액이 든 비닐 팩을 교체할 때를 제외하면 나는 8시간 넘게 그 끔찍한 동작을 반복했다. 그 외에는 당시 응급실 인턴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2
나는 1997년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94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여름에 수십 년 만의 혹독한 더위와 함께 김일성이 사망했고 1997년 의과대학에 입학하자 겨울에 IMF 사태가 터졌다. 운 좋게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애초에 의사가 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내내 성적이 제법 좋아 의과대학에 지원했을 뿐이다. 원래는 기자, 특히 전쟁터와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다. 종군기자가 지나치게 위험하다면 인류학자 혹은 다소 생뚱맞으나 극작가 겸 연극배우에도 관심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집은 그런 꿈을 넉넉하게 후원할 만큼 부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특출한 재능이나 가난과 역경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했는데 재능은 평범했고 의지는 나약했다.
그렇게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2년의 의예과 과정은 무사히 넘겼으나 ‘본과’라 부르는 4년의 의학과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본과 1학년의학과 1학년, 일반 대학의 3학년은 더욱 힘들었다. 물론 의학과 1학년이 가장 힘든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일반적으로 전체 인원의 10~20%가 유급한다. 나 역시 유급했고, 두 번째 의학과 1학년 때도 거의 꼴찌로 진급했다. 그 후에는 유급 없이 순조롭게 진급해서 결국 6년 과정을 7년 만에 ‘끄트머리에서 3등’으로 졸업했다. 다행히 의사 시험은 한 번만 에 합격했으나, ‘의학’이란 학문에 질렸고 ‘의사’란 직업을 수행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턴 수련 대신 군 복무를 선택했다. 요즘에는 군의관 인력이 부족해서 인턴 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의사도 군의관으로 임관하나 2004년 무렵에는 아직 군의관 인력이 부족하지 않아 인턴 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의사는 시골 보건소나 보건지소에 보냈다. 그런데 시골 보건소나 보건지소에도 ‘급’이 있었다. 다들 도시 지역의 보건소나 도시와 가까운 시골의 보건지소에 배치되길 바랐다. 그렇다 보니 군사 훈련과 공무원 교육을 마치고 치른 시험 성적에 따라 우선권이 주어졌고, 나는 그때도 시험 성적이 나빠 3년 내내 동해안에 접한 외딴 산골에서 근무했다.
‘공중보건의사 복무’라 부르는 그 3년의 군 복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임상의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선의 경우에는 영국으로 유학 가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유학할 학교까지 마음속으로 정했는데 ‘인류학의 탄생지’라 불리는 런던정경대LSE,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였다. 차선의 경우 의사학medical history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어쨌든 두 가지 모두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이유는 의과대학에 진학했던 때와 같았다. 우리 집은 넉넉하게 후원해 줄 만큼 부유하지 않았고 나는 눈부신 재능과 결연한 의지 가운데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한 나는 대학병원으로 돌아가 인턴 수련을 시작했다. 2007년 가을 내가 응급실 중환자 구역에서 10cc 주사기로 피를 짜 넣는 행위를 8시간 넘게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2007년 가을의 그 섬뜩한 장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의료인이라면 의사가 아니라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3
응급실에는 다양한 환자가 내원한다. 물론 외래에도 다양한 환자가 방문하나 응급실과는 다르다. 팔과 다리의 뼈가 부러졌을 가능성이 큰 사람은 대부분 정형외과 외래를 방문하지 생뚱맞게 비뇨기과를 찾지 않는다. 가슴 통증이나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사람은 심장내과나 흉부외과 외래를 방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런 환자가 내분비내과나 감염내과 외래를 찾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일반외과와 소화기내과처럼 서로 진료 영역이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그래도 외래를 방문하는 환자 대부분은 어느 정도 범위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응급실은 그런 예상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증상이라도 원인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의식 저하’로 119 구급대를 통해 도착한 환자가 있다면, 그로부터 뇌출혈, 뇌경색, 저혈당, 저나트륨혈증, 약물 중독, 극단적인 서맥이나 빈맥을 동반하는 부정맥, 패혈증 쇼크, 고혈당으로 인한 당뇨병성 케톤산증, 저혈량성 쇼크 등 다양한 질환을 감별해야 한다. 중증 외상 환자도 마찬가지여서 교통사고 현장에서 혈압이 극단적으로 낮은 쇼크 상태로 이송되면 호흡을 유지하고 혈압을 올리고 안정시키는 응급 처치뿐 아니라 신속하게 환자의 문제를 찾아내고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단순히 “중증 외상 환자입니다.”라며 모든 외과계열 임상과에 연락할 것이 아니라 경미한 외상성 뇌출혈, 늑골 골절과 경미한 혈흉hemothorax, 폐와 심장이 자리 잡은 흉강에 외상으로 피가 고이는 증상, 간 손상으로 인한 심각한 혈복강으로 진단하고 신경외과, 흉부외과, 일반외과를 호출하면서 ‘일단 일반외과 응급 수술부터 필요하다’는 식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당연히 막 의사 생활을 시작한 응급실 인턴이 해낼 수 없다. 심장내과 전문의, 신경외과 전문의, 흉부외과 전문의, 소화기내과 전문의처럼 특정 임상과의 전문의도 응급실의 변화무쌍하고 긴장 넘치는 상황에서 다양한 질환을 신속하게 감별해서 진단하고 적절한 조치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응급실에서의 진료’에 특화된 임상과의 수요가 생겼고 베트남전을 거친 1970년대 미국에서 ‘응급의학과’가 출범했다. 국내에도 1980년대에 소개되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응급의학과 의사가 배출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여느 신생 임상과가 그렇듯 제대로 자리 잡는 것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