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입장들
지난 2018년에 『서울 선언』을 출판하고 나서, 경기도의 도시에 거주하는 몇몇 분들로부터 저의 책이 ‘서울 패권주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경기도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또 다른 분들은 저의 책이 주장하는 대로 서울시의 영향력이 수도권 도시들로 침투하고 있다며 동의해 주셨고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울시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이 주변 도시들로 확산되고 서울시와 주변 도시들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음은 저의 바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서울 세력권’이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서울시 바깥의 도시들에 살면서 서울시로 출퇴근하려는 시민들이 주택 구매를 고려하는 지역의 바깥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이미 강원도 춘천, 충청북도 청주까지도 서울 세력권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경제적 부문에서는 서울시 주변 지역이 서울시와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분들이, 정치·문화적으로도 서울시와 주변 도시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에는 반발하시는 경우를 봅니다. 이러한 감정은 아마도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자치단체들의 공무원과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신이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서울과 수도권 도시들이 경제적으로 일체화되고 있다면 그 수도권 도시들은 정치·문화적으로도 서울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대서울’주장에 대해 일부 수도권 주민들이 반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반대로 수도권 각 도시에는 자기 도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여러 집단이 존재하며, 특정 주민만이 그 도시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기 전에 경기도에 속했던 지역들과 현재의 수도권 도시들에 대해, 저는 크게 세 가지 의견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농촌 시절부터 그 지역에서 농업 등을 직업 삼아 살아온 ‘진짜 토박이’분들, 두 번째는 서울에 출퇴근하면서 수도권에 조성된 신도시를 선택한 이주 1세대 및 이주 1세대의 자녀 세대로서 수도권 신도시를 고향으로 여기는 ‘아파트 원주민’『과천시사』의 표현, 세 번째는 현재 주요 활동지는 서울이고 수도권 도시에 임시로 주거를 마련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최근 두 번째 집단인 ‘아파트 원주민’분들이 사회적으로 발언권을 얻으면서 마치 이분들의 의견이 해당 지역 여론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집단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기 도시와 서울시를 바라보고 있으며, 어느 한 집단의 의견이 그 도시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제3장에서는 그러한 의견 차이가 실제로 각 지역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말씀드릴 것입니다.
‘경인京仁 메갈로폴리스’의 탄생과 수도길
이 책의 전편인 『서울 선언』에서는 조선 시대의 한양에서 식민지 시대의 경성을 거쳐 현재 서울시의 경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폈습니다. 특히 1936년에 영등포 지역이 경성에 편입되고 인천과 경성을 묶은 ‘경인’ 개념이 제시되면서 ‘대경성’이 만들어지고 1963년에 오늘날의 강남 3구를 포함한 경기도 지역이 대거 서울에 편입되고 1·2기 신도시가 경기도에 만들어지면서 ‘대서울’이 탄생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오늘날의 ‘대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양, 식민지 시대의 용산과 영등포, 인천과 경성 사이의 부평과 부천, 1·2기 신도시 및 서울시로 출퇴근하는 주민의 수가 많은 서울시 바깥의 경기도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천시의 구도심 지역은 처음에 경성과는 독자적으로 발달했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인천과 경성은 경제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기 시작합니다. 전기 회사의 예를 들자면, 1898년에 조선인들이 세운 한성 전기 회사가 1904년에 미국 회사와의 합작으로 한미 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1908년에 일본인들이 세운 일한와사 주식회사가 1909년에 한미 전기를 인수했고, 1912년에는 1905년에 설립된 인천 전기도 매수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에 회사명을 경성 전기로 바꾸면서, 인천 전기는 경성 전기 인천 지점이 되었습니다. 인천의 구도심인 중구 신흥동에는 식민지 때 만들어진 나무 전봇대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 전봇대에는 ‘개성 전기’를 뜻하는 ‘경京’이라는 글자를 생긴 명판이 붙어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 은평구의 수색 변전소가 경인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인천 구도심과 한양·경성 사이에는 경인선 철도와 경인로 도로가 깔리고, 노량진에서 한강 물을 취수해서 인천 구도심으로 보내는 상수도 파이프가 설치되면서 그 위에 수도로水道路가 생겨납니다. 이 세 개의 간선 노선은 인천 구도심과 한양·경성 사이를 점차 긴밀하게 연결하고, 그 중간 지역인 부평, 부천 등도 차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특히 부천의 경우에는 경인선·경인 국도·수도길이라는 3대 간선이 ‘부천시’라는 지역 정체성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도길가 공장 지대의 어느 상가 건물에는 ‘부천 공구’ ‘경인 상사’ ‘강남 화공 약품’이라고 미름 붙은 가게들이 나란히 입주해 있고 양귀자 선생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 초판 표지에 실려 있는 원미동 23통 지도에는 ‘서울 미용실’ ‘강남 부동산’ ‘김포 슈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부천의 서북쪽인 김포와 동쪽인 서울·강남이 공존하는 모습들이 근현대 부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서울 지하철 1호선 신길역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경인선·경인로·수도길이 인천을 향해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1936년에 경성에 편입된 영등포로부터 인천을 향한 경인 벨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당시 인천 수도仁川水道라 불리던 노량진 정수장에서 출발한 수도길은 영등포에서 경인선 철도 및 경인로와 엇갈리며 서울시 서쪽의 김포 정수장으로 올라갑니다. 김포 정수장은 지금의 서서울 호수 공원입니다. 이곳의 서남쪽에는 서울시 양천구와 부천시의 경계 지점이 있는데, 두 지자체의 도로 포장 방식이 달라서 시각적으로 행정적 경계를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행정 단위의 경계선 가운데 서울 쪽으로는 버스와 택시 회사들, 서울 과학 수사 연구소, 서울 지방 경찰청 제4기동단, 요양원 등 경계적 성격이 강한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에 서울 시내에서 발생한 철거민들을 위한 마지막 집단 정착지인 신월 6동 이주 단지도 이주는 ‘짝궁집’이라고 하는 독특한 주택 형태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되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편 이 경계선의 부천시 쪽에는 수도길을 따라 ‘서울’ ‘한양’ ‘강서’ 등의 지명을 붙인 시설이 많이 보입니다. 수도길은 ‘↖’ 방향으로 부천시 고강동을 지나가 ‘←’ 방향으로 부천 제일 시장을 통과한 뒤 ‘↙’ 방향으로 원정동을 지나 부평을 향합니다. 고강동과 원정동은 원래 성지동이라는 하나의 동에서 1989년에 갈라진 것인데, 인천시에서 출판한 『사진, 시간을 깨우다: 산업화 시절 인천 이야기』인천광역시청, 2016에는, 김포 정수장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수도 파이프에서 새어 나오는 물을 이용해서 부천 성지동의 농민들이 농사를 잘 지었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중동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 이 일대가 논밭이던 시절의 모습입니다.
일제 말 1944년에 설치된 이 송수관은 10여 년 전부터 곳곳에서 새 나오기 시작했다. 인천시 수도국은 정기적으로 현장에 나와 벌어진 틈을 콘크리트로 때우거나 구멍을 말뚝으로 막아 놓았지만 높은 수압을 이겨 내지 못해 물이 새 나갔다. 아예 농민들은 말뚝을 뺐다 닫았다 하면서 마치 수도꼭지 틀 듯 자유자재로 논물을 댔다. 심한 가뭄으로 이웃 마을들이 모내기를 못 할 때도 저수지도 없는 이 마을은 물 걱정 없이 모내기를 끝내곤 했다. 물이 콸콸 솟는 곳은 물웅덩이까지 생겨 마을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정도였다. 1977년 당시 김포 정수장이 송수관을 통해 인천으로 보내는 물은 하루 5만 톤. 당시 흄관의 평균 누수율은 30퍼센트 선으로 5만 톤 중 1만 5,000톤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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