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필왈리!
맹자, 양나라 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노인장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와주셨는데 아마 내 나라는 이롭게 할 방안을 갖고 계시겠지요?”
맹자, 대하여 말씀하시다.
“왕께선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의가 있을 따름이외다. 왕께서 ‘내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는 ‘어떻게 하면 내 가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이고, 또 사士와 서민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이외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게 마련.
만승의 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할 자는 반드시 천승의 가문에서 나오고, 천승의 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할 자는 반드시 백승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의 봉록을 취하고,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의 봉록을 취하니 적은 것이 아니건마는, 그러하나 의를 뒤로하고 이를 앞세우면 윗사람 것을 빼앗지 않곤 만족하지 않을 터입니다.
인한데 제 부모를 버리는 자가 있을 수 없고, 의로운데 임금을 팽개칠 사람도 없습니다. 왕의 말이라면 오직 인의일 따름인데 하필이면 이익을 운운한단 말이외까!”
(중략)
이익 추구 방법을 묻는 혜왕의 절박한 요구에 맹자는 매몰차게 사랑仁과 정의義의 정치로 응대한다. 맹자가 초빙에 응한 까닭은 군주의 사익 혹은 국익을 증진할 기술적 방안을 제공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스스로 ‘천하 대란을 극복하고 건설할 새 문명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연찬하여 획득한 전망인 ‘도덕 정치학’을 제시하고자 함이었다. 도덕 가치에 대한 고려 없는 맹목적인 이익 추구는 국가의 멸망과 군주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뿐이라고 맹자는 결론 내렸다.맹자를 ‘우활迂闊하다’, ‘비현실적이다’, ‘이상적이다’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이익 대 인의’의 대결 구도는 맹자 정치사상의 기본 축인데,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표지이기도 하다. 실은 『맹자』는 『논어』의 첫 번째 해설서다. 마치 『한비자』가 『도덕경』의 첫 번째 해설서이듯 『맹자』 전체의 물밑에는 『논어』가 깔려 있다. 앞으로 각 장절을 해설하면서 『논어』와의 관련성을 지적할 테지만, 여기 ‘이익 대 인의’의 구도 역시 공자의 실마리를 맹자가 확충한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면 원망이 많다放於利而行, 多怨”『논어』, 4:12라며 이익 추구가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리라던 공자의 경고는 하나의 실마리다. 공자가 ‘이익 대 의리’로 명쾌하게 둘을 구분하여 대치한 것은 맹자 도덕론의 사상적 기원을 알려준다.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
-『논어』, 4:16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는 덕德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士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形을 조심하고 소인은 혜택惠을 바란다.”
_『논어』, 4:11
정의와 덕성을 군자의 범주에 속하게 하고, 이익과 혜택을 소인의 범주에 집어넣는 이분법은 맹자 사상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는다. 맹자는 공자의 도덕주의를 확신했기에 대국 군주의 면전에다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군주라면 다만 인의를 논할 따름이지요!’라고 일갈할 수 있었다. 맹자는 당대를 권력자와 부자들은 거리낌 없이 방만하고, 서민들은 전쟁과 굶주림으로 생명을 이을 수조차 없는 ‘야만의 시대’로 파악했다. 이에 공자의 사상 가운데 특별히 의를 드러내어 인의仁義로 개념화하고, 말마다 ‘사랑과 정의의 정치’를 주창한 것이다.
다만 맹자는 이익을 도외시한 ‘도덕 지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경제학자’였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일관된 마음이 있다.”有恒産者有恒心, 5:3고 지적할 만큼 인간에게 물질적, 경제적 환경이 중요함을 깊이 인식했던 사람이다. 또 사장의 이익 추구는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기도 했다.5:4 다만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영역’과, 사랑과 정의를 중시하는 ‘공공 영역’이 선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두 영역이 뒤섞여 공공 영역이 시장판에 휩쓸려가 공동체의 가치가 사라지고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대 위기의 핵심이었다. 이에 맹자는 공공영역과 시장 영역을 분리하고, 공정성이 관철되는 사회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그가 정치가의 주제는 인의, 곧 도덕 가치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여기 ‘하필왈리’는 도덕을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큰 이익大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장의 끝 대목, “의로운데 임금을 팽개칠 사람도 없습니다”라는 주장이 그 증거다. 군주가 눈앞의 사익에 몰두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고”, 반면 인의를 북돋우면 “임금을 팽개칠 사람도 없다”. 그러니 어느 것이 큰 이익인지 선택하라는 식이다. ‘작은 이익’과 ‘큰 이익’을 구별하는 눈, 정치적 지혜를 맹자는 군주에게 요구하는 셈이다. 만나자마자 국익 증진 방안을 요구한 군주에게 맹자는 역설적으로 큰 이익(=인의)의 방책을 알려준 것이다. 이렇게 읽자면 맹자의 ‘하필왈리’라는 일갈은 혜왕의 간절한 이익 추구 욕망에 대응하여 보다 큰 이익의 방안을 제시하려는 충격요법이 된다. 이해타산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작은 이익보다는 큰 이익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맹자가 이익 대신에 제시한 도덕 가치, 인의란 무엇인가. 공자 사상의 핵심어인 인仁은 내 주변에서, 즉 집안이나 마을 혹은 학교나 직장에서 말과 뜻이 소통하는 ‘함께 더불어 살기’다. ‘함께 더불어 살기’의 원동력은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라는 자기애에 가득 찬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다’로 전환하는 순간, 평화로 가는 길이 툭 열린다. 공자는 이 전환의 극적인 순간을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단 하루라도 이기심을 극복하고 관계성禮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이 문득 인으로 변화한다”『논어』, 12:1라고 토로한 터였다. 입때껏 ‘나’만이 존재하던 세계, 혹은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그대, 곧 부모와 형제, 친구와 농부들이 있기에 겨우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는 순간 ‘함께하기’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은 홀로, 따로, 눈앞에 보이는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움은 너와 나 사이 어디쯤에 있는데, 이는 네가 있음에 내가 존재함을 깨닫는 순간 문득 드러난다. 시 한 구절을 빌리자면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김남조, 「그대 있음에」라며 손을 내밀어 상대를 영접하는 순간 피어난다. 그 꽃송이의 이름을 따로 인이라 부를 따름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어가 인이라면 맹자는 의를 덧붙여 인의로 확충했다. 인이 사랑이라면 의는 정의다. 의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부정한 사회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다. 공자가 “오로지 인자仁者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논어』, 4:3라고 했을 때 이미 인과 미워함惡이 내밀하게 만나고 있다. 또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것 역시 인을 실천하는 것”『논어』, 4:6이라고 강변했을 때도 ‘불인을 미워하는’ 의가 숨어 있었다.
『논어』를 숙독한 맹자는 공자의 사상 속에 알알이 박힌 의라는 개념을 밖으로 꺼내 인에 덧붙여 인의를 구성하였다. 춘추시대가 ‘내 손을 내밀어 남의 손을 잡아주는’ 사랑만으로 족했다면, 전국시대는 악이 범람하여 정의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절박했기 때문이리라. 특기할 점은 맹자가 인의의 근거를 ‘사람 마음’에서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마음의 발견은 맹자의 가장 큰 기여”인데, 맹자는 의가 수치심과 증오심, 곧 수오지심에서 비롯한다고 확신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픈 사람을 배려하고, 나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에서 도덕심, 곧 인의의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갖추고 있다루소의 말처럼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를 구성하는 수치심과 증오심을 좀 더 살펴보자. 맹자 사상의 한 가지 핵심이 여기 있으니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수치심은 ‘자기 잘못’을 성찰하는 양심이다. 새벽녘에 잠이 깨어 어제 한 일을 헤아리다가 문득 목덜미가 발갛게 타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이 수치심이다. 부끄러움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드러내준다. 통증이 몸의 이상신호이듯, 부끄러움은 이상 신호다. 수치심이 인간의 기본 요건인 까닭은, 부끄러움만이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sympathy과 부정의不正義에 대한 증오심의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 필수적인 마음가짐인 공감 능력이 부끄러움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껴 수치심이 차오르면 공분公憤 능력, 즉 증오심으로 표출된다. 증오심은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미루어 공동체에 적용할 때 생기는 ‘공적 수치심’이다. 수치심이 개인의 덕성이라면 증오심은 사회적 덕목이다. 제 몫은 꼭 챙기면서 남의 사정은 거들떠보지 않는 동료에 대한 미움, 제가 저지른 불법을 합법화하는 권력자에 대한 분노,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죽이는 짓에 대한 증오심이 정의감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증오심의 밑바탕에는 수치심이 깔려야 하고, 수치심은 증오심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안팎으로 정의가 선다. 그러므로 사회를 이룬다는 것, 정치를 행한다는 것의 밑바탕에는 ‘수치심과 증오심을 갖춘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정리하면 공자와 맹자의 꿈인 인의의 세계는 함께 더불어 사는 문명사회다. 문명사회는 부끄러움을 타는 감수성을 갖춘 정치가와 공직자들에 의해 건설될 수 있다이것이 맹자가 양혜왕을 천 리가 멀다 않고 찾아가 인의를 권고한 까닭이다. 거꾸로 부끄러움을 잃은 소인배들의 권력에 인민이 대응하는 방법은 증오를 바탕으로 한 저항이다. 저항은 공자와 맹자가 권하는 합당하고 올바른 길이다. 공자가 ‘정당한 복수는 옳다’며 이직보원李直輔怨의 원칙을 권했던 것은 권력자의 방자한 사익 추구에 정당한 복수가 가해지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붕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논어』, 14:36. 또 맹자가 자기 이익만 차리면서 공동체를 해치는 군주는 한낱 ‘홑사내一夫’에 불과하다며 역성혁명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까닭도 이 때문이다2:8.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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