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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은 2003년 여름 시작되었다
사법개혁에 불붙인 4차 사업파동
당신은 지금 막 서울 지하철 2호선 교대역 10번 출구로 올라왔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서초역으로 이어지는 서초대로다. 양편으로 오피스 빌딩들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빌딩과 그 뒤편으로 변호사 사무실 간판들과 함께 음식점·주점·커피숍 간판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멀리 언덕 위에는 두 개의 건물이 이 서초동 법조타운을 굽어보고 있다. 법과 정의를 상징하며 법조타운의 젖줄이 되는 법원과 검찰청 건물이다.
서초동 법조타운 거리와 골목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소용돌이친다. 죗값을 탕감받기 위해 돈다발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억울함에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다. 정의를 집행하려고 벼르는 사람도 있고, 정의를 집행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다. 출세를 꿈꾸는 사람도 있고, 울분을 삭이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다른 목적, 다른 욕망을 품은 사람들이 이 거리의 교차로를 지나가고 있다.
2003년 8월 11일 저녁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날은 월요일이다. 법조타운의 한 후미진 식당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 세 명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인다. 박시환 서울지방법원서울지법 부장판사와 이용구 판사 등 후배 판사들이다.
“이근옹 대전고등법원대전고법 원장, 김동건 서울지법원장, 김용담 광주고등법원광주고법 원장. 이렇게 세 명으로 정해졌답니다.”
다음 날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최종영 대법원장에게 추천할 대법관 후보자 명단이다. 세 명의 대법관 후보는 사법시험 10~11회 법원장들. 박 부장판사가 목소리를 높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판사들 뜻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고.”
“그러게 말입니다. 또다시 서열대로 갈 줄은… 개혁하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막막한 얼굴들이다. 이제 대법원 개혁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 국면을 타개할 방법은 없는 걸까. 그해 2월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해 판사들의 개혁 요구가 코트넷에 물밀 듯 올라왔다. 대부분이 대법관 인선에 거는 기대였다.
법관들 나아가 국민들에게 대법관은 ‘살아 있는 정의’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의’를 임명하는 모습이 행정부 고급 관료를 선발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최종 ‘승진’ 단계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법원 스스로 ‘살아 있는 정의’를 무너뜨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런 대법관 선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진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법원만 언제까지나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대법원에도 진보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법관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대법관 인선이 절박했던 것은 대법원이 ‘보수의 철옹성’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법원 조직은 달라진 게 없었다. 수뇌부 면면만 바뀌었을 뿐이다. 대법관은 여전히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라, 서열에 따라 승진하는 자리였다. 살아온 길이 같다보니 생각도 같았다. 대법원 판결은 과거 판례에 묶여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판사들을 더 답답하게 한 것은 법원의 과거사 문제였다. 유신시대와 전두환 정권 때 독재권력에 순응했던 법원이, 고문 피해자들의 호소에 귀를 막았던 판사들이 ‘사법권 독립’의 방패 뒤에서 한마디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무슨 정의를 이야기하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인가.
변화에 목마른 판사들에게 노무현 정부 출범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비검찰 출신 법무부장관 임명, 서열 파괴 검찰 인사, 국가정보원 개혁… 대법원도 대법원 후보 제청에서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그 희망의 풍선이 한순간에 터지고 말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박 부장판사 입에서 ‘사표’ 얘기가 나온 건 그때였다.
“지금 꺾지 않으면 꺾인다고. 나라도 사표를 내야…”
“사표를 내신다고요?”
박시환이 흥분할 때마다 “섣불리 나서지 마시라”고 말리던 후배들이었다. 그들도 이번 사표 얘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께서 사직서를 내시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박시환의 사표가 타개책으로 떠오른 이유는 그의 상징성에 있었다. 그는 1980년대 시국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뒤 좌천성 인사를 당하면서 법관 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하면서 법원 내 개혁세력의 얼굴로 부각되었다.
다음 날인 8월 12일 아침 박시환이 판사실에 출근하자 전화벨이 울렸다. 판사 시절 우리법연구회 활동을 함께했던 강금실 법무부장관이었다.
“박 부장님. 사표 내기로 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강금실은 박시환의 사표 제출을 만류했다. 역시 우리법연구회 회원인 이광범, 한기택 부장판사가 박시환을 찾아왔다. 그들도 법원에 남아 힘을 모으자고 설득했다. 박시환은 “좀 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3시 대법원 6층 회의실에서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열렸다. 비공개 회의 중 이변이 일어났다.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 회장과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돌연 퇴장했다. 박재승 회장은 뒤이어 대법원에 팩스를 보냈다. ‘자문위원직을 사퇴합니다.’
강 장관도 자문위원 사퇴서를 제출했다.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다는 자문위원회 본래 취지와는 달리 대법원이 기존 관행대로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려고 한다. 더 이상의 참여는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문제 삼은 것은 두 가지였다. 대법원이 제시한 대법관 후보자 세 명이 서열 중심의 고위 법관들이라는 점, 그리고 자문위원회 운영 방식이 일방적 통보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처음으로 열렸지만 대법원의 레퍼토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건을 판결해야 하는 대법관의 최우선 조건은 업무처리 능력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분리되어 있는 만큼 대법원은 인적 구성의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크지 않다.”
두 사람이 사퇴하자 대법원은 진화에 들어갔다. “법무장관과 대한변협 회장이 중도에 회의장을 나가긴 했지만 두 분 모두 의견을 밝혔다. 두 분의 의견은 최종영 대법원장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터져나오는 판사들의 반발은 막을 수 없었다. 문홍수 서울지법 부장판사가 코트넷에 글을 올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관의 지위가 고위직 법관들의 승진 자리로 인식되어선 안 된다. 다양한 성향의 법조인사로 충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당한 주장을 곡해하고 소수의 주장으로 폄하하려 들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마피아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날 저녁 박시환과 후배 판사들이 다시 모였다. “어제 얘기한 대로 해야겠지?” 후배들 뜻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시환은 사표를 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오전 박시환은 김동건 서울지법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법원장실을 나온 뒤 기자실에 들러 A4 용지 한 장 분량의 ‘법관직 사직의 변’을 돌렸다.
우리 사법부는 외부의 흐름에 밀려 마지못하여 변신의 흉내만을 내었을 뿐 그 속내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채 과거 암울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대 사법의 기본 구조를 지금 이 시점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사법부의 변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며, 시대의 엄숙한 요구에 대한 중대한 외면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 이 보잘 것 없는 제물이 새롭고 자랑스런 사법부의 탄생에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기자들이 판사실로 몰려들었다. 박시환은 “내가 기자실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는 기자실 앞에서 말을 이어가다 눈물을 쏟았다.
“저는… 좋은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시환의 사표 소식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서울지역 단독 판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용구 판사가 코트넷에 글을 띄웠다. 이 판사는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첨부 문건에서 최종영 대법원장의 재고를 촉구했다.
현재까지 진행된 대법관 인선 과정은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좌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법관들은 기존의 대법관 선임이 법관 승진의 최종 단계로 운영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지나치게 동질적인 연령·배경·경험을 가진 법조인들로만 구성되었고, 이러한 인사 제도는 법원 내적으로 수직적인 관료 구조를 과도하게 심화시켰으며 (…)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 현재의 규범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의 이해관계만을 반영한다면 대법원은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퇴행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 사회적 소수가 주장하는 법 논리의 설득력 유무를 문제 삼기에 앞서 소수자들의 이해관계에 관해서도 충분히 번민하여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법원을 구성하여야 합니다.
4차 사법파동의 시작이었다. 그날 하루 연판장에 서명한 판사가 100명을 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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