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러나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힐러리 코헨Hilary Cohen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와 골드만삭스의 가르침에 한껏 고무되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머릿속을 맴도는 한 가지 질문으로 고민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지?
2014년 조지타운 대학 4학년의 봄이었다. 그녀는 졸업 후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했다. 경영 컨설턴트가 되어야 할까? 랍비가 되어야 할까? 곧바로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을 도와야 할까? 아니면 일단 기업에서 경험을 쌓아야 할까? 당시 그녀는 미국의 엘리트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타인을 돕는 데는 기업에서의 경험이 필수적이라는 지배적인 메시지에 젖어 있었다. 의미 있는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을 주도하는 곳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상은 그녀 세대에게 일반적이었지만 코헨의 배경을 감안하면 뜻밖이었다. 그녀는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을 구독하는 휴스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는데, 어머니는 정신건강 분야와 유대인 공동체에서 열심히 자선활동을 했고 아버지는 금융채권,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다른 아버지들이 소프트볼을 지도하듯이 딸에게 투자 분석을 가르쳤는데, 예컨대 쇼핑몰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상점에 가장 긴 줄이 늘어서 있는지 살피도록 했다. 때때로 그는 딸의 관찰을 근거로 주식을 샀고 주가가 오르면 크게 칭찬했다. 고소득자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코헨은 유아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킨케이드 스쿨the KinKaid School에 다녔는데, ‘전인全人’ 교육과 ‘지적·육체적·사회적·윤리적 균형 성장’의 철학을 표방하는 사립 학교였다. 이러한 학교에 다니는 대다수 학생이 그렇듯이, 그녀가 한때는 높은 이상을 품다가 사회봉사 요건을 완수하고 결국 아버지처럼 돈 잘 버는 화이트칼라 직종에 자리를 잡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그러나 코헨은 꽤 오랫동안 정치와 공공서비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3학년 때부터 어지간한 학생회 임원은 다 맡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2032년 힐러리 코헨”이라는 ― 온라인에서는 페이스북Facebook 그룹으로, 현실에서는 실물 티셔츠로 뒷받침된 ― 대통령 출마의 꿈을 품었다. 고교 시절에는 휴스턴 시장의 청년 협의회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 대학의 여름 강좌인 ‘의회: 정책, 정당, 제도’를 수강했으며, 미 의회에서 인턴으로도 일했다. 마침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그녀는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 다른 궤도에 진입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몸에 밴 사업에 대한 흥미, 정치에 대한 고유한 열정 그리고 어렴풋하나마 수학 또는 과학의 한 과목, 혹은 기타 어려운 학문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을 품은 채 대학에 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변화를 감지했다. 오래된 석조 건물과 녹색 사각형 안뜰에서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대학생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교육학에 관한 신입생 세미나를 수강한 그녀는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을 읽었다. 그녀는 이 책을 두고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아마도 대학 생활 그리고 결국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휴스턴의 부유한 동네에서 성장했고, 금융인의 슬하에서 배웠으며, 명문 조지타운에 들어가기 위해 최고의 예비 학교prep school를 거친 이가 품었음 직한 인생의 목표에 관한 수많은 가정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 통째로 흔들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돈을 버는 인생은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택하는 것일 뿐, 부가 우리가 추구하는 선善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는 그저 유용할 따름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보다 더 위대한 목표를 찾으라고 하는 이 가르침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코헨은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인생의 목표라고 착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토해요.” 영광, 돈, 명예, 명성. “무엇보다도 그는 이러한 것들이 결국에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하죠.” 그에게 유일한 지고地高의 선은 ‘인간의 행복’이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코헨은 철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한 이 고대의 고민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 이해하고 싶었기에 심리학, 신학, 인지과학 수업도 들었다.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녀는 ‘타인을 위하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관념을 추구하고 싶다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많은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긍정적인 변화의 주역이 되고 싶었다. 또래 사이에서 이러한 욕망이 널리 퍼져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불운한 이들에게 어떤 은총도 내리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들이 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종종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코헨이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던 2010년 초만 해도 불평등에 대한,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분노가 아직 절정에 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회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대침체 이후 회복의 기운은 여전히 더뎠다. 워싱턴에 있는 대학 주변에도 고급 주택이 눈에 띄게 늘면서, 최근 20년 사이 2구역Ward Two. 백악관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대학들이 위치한 곳을 말한다.의 흑인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학생들은 대학 신문 「호야The Hoya」의 보도로 이 사실을 알았다. 코헨이 입학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아주 색다른 느낌의 티파티Tea Party.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에 반발하며 2009년부터 시작된 보수주의 운동으로, 작은 정부와 재정 건전성을 중시한다.가 2010년 중간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바네사 윌리엄슨Vanessa Williamson과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은 그 운동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책에서 “그들워싱턴의 정치인들을 의미한다.은 더 이상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는 티파티 성원 베벌리Beverly의 말을 인용했다. 이 책은 코헨이 신입생이던 해 봄에 출판되어 조지타운에서 교재로 쓰였다.
코헨이 2학년이던 해, 첫 두 주 동안에는 ‘점령하라 운동Occupy Movement’이 출범했다. 이 운동이 선전한 덕에 코헨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미국인들이 구글에서 ‘불평등’을 검색한 횟수는 두 배로 늘었고 ‘1퍼센트’ 검색은 세 배나 늘었다.
그녀가 3학년이던 해 봄, 조지타운 대학의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예수회 출신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는 즉각 “시장의 절대적인 자율성과 금융 투기를 거부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빈곤이 발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특히 불평등을 “사회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호야」는 로마에서 울려 퍼진 이 말들이 캠퍼스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중에 코헨과 함께 자선활동 프로젝트에 진력하게 될 예수회 사제이자 정치학 교수인 매슈 카네스Matthew Carnes는 불평등에 대한 대학에서의 오랜 비판이 교황에 의해 “옹호되었다”고 신문에서 말했다. 코헨이 4학년이 되기 전 여름에는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뜻으로 2012년 미국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방범 요원이 이듬해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나면서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을 총칭한다.’와 관련한 이슈가 불거졌는데, 동급생 중 다수는 현대 미국 역사상 불평등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 중 하나인 이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코헨이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무명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경이로운 베스트셀러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을 출판했다. 2.5파운드에 달하는 704쪽의 이 책은 불평등을 통렬하게 폭로했다.
피케티와 몇몇 동료들은 코헨이 졸업과 동시에 돈을 벌기 시작한 2014년 무렵, 깜짝 놀랄 사실을 담은 논문을 출간한다. 연구는 코헨 같은 대졸자가 소득 상위 10퍼센트에 속할 것이라는 신중한 가정을 전제로 해서 1980년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보다 세전 수입이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코헨이 소득 상위 1퍼센트에 속한다면 그녀의 수입은 부모님 시대의 1퍼센트가 번 것의 세 배 이상 될 것이었다. 참고로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여 보정했을 때 1980년에 42만 8,000달러인 엘리트의 1년 평균 수입은 2014년 130만 달러에 이른다. 만일 희박하나마 그녀가 상위 0.001퍼센트에 든다면, 그녀의 수입은 1980년의 그것보다 일곱 배나 더 많은, 1억 2,200만 달러가 될 것이다. 연구에는 같은 기간 미국인의 하위 50퍼센트의 세전 평균 임금이 1만 6,000달러에서 1만 6,200달러로 인상되었을 뿐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포함되었다. 달리 말해서 1만 1,700만 명의 사람들은 “1970년대 이래 경제성장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고 피케티, 이매뉴얼 사에즈Emmanuel Saez, 가브리엘 주크만Gabriel Zucman은 말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였던 기술 혁신의 한 세대가 미국인의 절반을 위해서는 이렇다 할 진보를 가져다주지 못한 것이다.
코헨은 양극화되는 미국의 현실 속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녀의 열망을 가장 잘 포착한 구절은 조지타운의 복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는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꿀 것이다”였다. 이 말은 사회문제가 가득한 시대에 그 해결에 힘쓰겠다는 널리 퍼진 이상을 대변했다. 또한 그러한 이상이 시장 자본주의의 제도와 관행에 의해 어떻게 굴절되는지도 드러냈다.
코헨과 그 친구들이 타인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해 고민할 때, 이들은 자신들의 시대 감성에 따랐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지금은 위상이나 영향력 면에서 자본주의에 대적할 만한 이데올로기가 없는 시대이자, 사회변화와 같은 주제를 고려할 때조차 시장의 언어, 가치, 가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다. 대학의 사회주의 동아리는 사회적 기업 동아리로 대체되었다. 학생들도 광고, 그리고 이른바 지식 소매상들의 테드Ted 강연과 책이 전파하는 기업 세계의 율법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요컨대 무엇을 하든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정도의 “규모”로 하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좋은 일을 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고 집요하게 말했다. 결국 코헨과 친구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을 때,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벤처를 창업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에 도전하는 것보다 선을 건설하는 것이 더 영향력 있다고 믿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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