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선인들의 오래된 글을 읽으면서 틈틈이 적은 ‘앙엽기盎葉記’이다. 되도록 ‘지금, 여기’에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글 위주로 뽑아 생각을 붙였다. 짧은 독서 단상이다. 눈길이 오래 머문 글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길게 썼다.
오래 묵을수록 향기로워지는 것들이 있다. 옛글이 그렇다. 단순히 선인들의 지혜만 배울 수 있는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글이 아니다. 오래된 글은 향기롭다. 그 향기 속에 선인들이 숨을 쉰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는 생각의 무늬가 느껴진다. 그 순간 독자는 글의 향기에 빠진다. 자신도 모르게 삶을 마주한다.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돌아본다. 책을 오래 잡으면 생각은 인간·역사·자연으로 확장된다. _「서문」에서
꾸준한 노력만이 길,
사자가 토끼를 잡는 법
| 「아이들의 시권 뒤에 쓰다」, 『완당전집』, 김정희
무엇보다도 이 일은 특별히
신령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당연히 입으로 설명하거나 붓으로 써서 전달할 수는 없다.
모름지기 동파와 산곡 두 시집에 나아가 익숙하게 될 때까지
보고 읽기를 천 번 만 번에 이르면 저절로 신명神明이 있어
사람에게 계시하여 주게 된다.
제일 경계할 점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하려 해도 안 된다.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가장 주의해야 한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며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最是此事 別有神解 然後可以說到. 又不可以口喩筆傳.
須就東坡山谷兩集 熟看爛讀 千周萬遍 自有神明告人.
最忌心麤 又忌欲速 又忌赤手捕龍.
獅子頻申 捉象亦全力 搏兎亦全力
완당 김정희가 아이들의 시를 묶은 두루마리, 즉 시권에 써준 짧은 글이다. 완당은 아이들의 시를 놓고 품평을 해야 했는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시를 평가하는 일은 시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완당은 할 수 없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중국 북송의 시인 소식동파과 황정견산곡의 작품을 자주 읽을 것을 권한다. 천 번 만 번 계속 읽다 보면 시에 대한 안목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사자에게 토끼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토끼를 잡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코끼리를 잡을 때처럼 전력투구해야 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거나 하는 일이 작더라도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완당이 ‘꼬마 시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꾸준함,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다. 어찌 보면 어른이 아이에게 으레 하는 덕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완당에게 이러한 태도는 오랫동안 스스로 실천하며 체화한 덕목이다. 완당의 서체인 추사체는 얼핏 즉흥적으로 휘날려 쓴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기괴한 글씨체를 들어 그의 천재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당의 글씨가 오랜 연습과 수련의 결과에서 나왔다는 점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완당전집』에는 완당이 글씨 공부를 위해 얼마나 전력투구했는가를 토로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그는 제자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글씨 인생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70년 동안 벼루 10개를 갈아 밑창 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완당은 또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이당 조면호에게 보내는 편지에 “팔뚝 밑에 309개의 비문이 들어 있지 않으면 예서를 하루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써내기 어렵다[不有腕底有三百九碑 亦難一朝之間出之易易耳]”면서 스스로 『한례자원漢隷字源』에 들어 있는 한나라에서 위나라까지의 예서 비문 309개를 통달했음을 내비쳤다. 완당에게 서예든 그림이든 작품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은 곧 수련과 연찬이었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재능으로 만들어진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그러나 완당은 더 나아가 명작은 99.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완당은 석파 이하응의 난 그림이 99.99%의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하면서도, 거기에 0.01%의 공력을 더 기울이라고 주문한다. 제자의 성장을 위한 채찍 치고는 꽤 가혹하지 않은가.
아무리 9,999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그 나머지 1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9,999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1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뜻을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에 깊이가 있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1분의 공력이다.
- 김정희, 「석파의 난 그림에 쓰다」
명필 한석봉의 신필神筆도 타고난 게 아니었다. 처음에 글씨에 대해 몰랐던 그는 당시 유행하던 조맹부 글씨를 체본으로 삼아 베껴 썼다. 그러나 뒤늦게 접한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됐다. 그 후로 왕희지의 서첩을 베껴 쓰고 또 썼다. 그는 자신의 서예 철학을 담은 「석봉필론石峯筆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한 글자를 쓰고 내일 열 글자 배우며 매달 연습하니 해마다 성과가 나타났다.
今日畫一字 明日學十字 月習歲得.
석봉 한호와 완당 김정희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석봉이 단정한 해서체로 한문 서예의 전범을 보였다면, 완당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로 서예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들의 글씨를 명필이라 한다. 그러나 명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추사의 구멍 뚫린 벼루와 몽당붓, 그리고 부단한 연습을 강조한「석봉필론」이 그 증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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