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노예’로 회사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던 나를 바꾸어놓았고 지금은 노동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저 나쁜 짓 하지 않고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착하고 순진한 박창진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 누구도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인간 박창진이 있다.(11쪽)
프롤로그
나는 왜 싸우는가
내 이름은 박창진이다. 201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의 불합리한 명령으로 비행기에서 쫓겨나 12월의 매서운 추위가 기승이던 새벽 뉴욕 JFK공항에 홀로 남겨졌다. 그 후유증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으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뒤통수에 어른 주먹만 한 종양이 자라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또한 팀장 신분으로 항공기 객실을 책임지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일반승무원으로 강등당해 신입에게 주어지는 일을 하는 등 회사의 핍박을 견디는 동시에 온갖 유언비어와 모함에 시달려왔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느냐고 말이다. 땅콩회항이 있은 지 어느덧 만 4년도 더 지났건만 이 모든 일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가해자인 조현아 씨는 대중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 “반성한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시간이 지나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자 스리슬쩍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비록 그 뒤에 그녀와 그 가족들의 다양한 ‘갑질’ 행태가 보도되고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면서 다시 꼬리를 내렸지만 이제 그 누구도 그녀를 포함한 총수 일가가 진심어린 반성을 한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내 삶에도 변화가 많았다. 그 사건은 이전까지 ‘자발적 노예’로 회사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던 나를 바꾸어놓았고 지금은 노동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저 나쁜 짓 하지 않고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착하고 순진한 박창진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 누구도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인간 박창진이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나는 현재 대한항공 직원연대라는 새로운 사내 노동조합의 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조씨 일가의 전횡을 비판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언론 매체에 인터뷰를 했지만 정작 내 목소리로 땅콩회항 당일의 일과 그 이후, 내가 싸우는 이유를 온전히 밝힌 적은 없었다. 이제 내 입으로 직접 말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한 일들을 외면하고 살았던 20여 년은 대체로 회사에서 인정받아온 세월이었다. 2014년의 그 일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뼈아픈 경험을 통해 깨닫은 사실이지만 이제라도 그런 의식적인 무관심이 나 자신을, 회사를 망가뜨렸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내 얘기를 제대로 하려면 내 직장 생활을 되돌아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땅콩회항, 물컵 갑질 등 회장 일가의 만행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라는 것도 입증될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은 누구라도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어쩌면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누군가는 겪고 있을 일이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당황하고 절망스러웠지만 그 다음에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해졌고, 뭔가 큰 교훈을 주려는 사람처럼 돼버렸지만 내가 그런 걸 의도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난 그저 밟혀서 부러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단지 사람들에게 이 모든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고통스러운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지난해 5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했던 집회를 말해야 할 듯하다. 한 직원이 익명채팅방에서 대한항공 회장 일가의 갑질 제보를 받으면서 시작된 저항의 목소리는 온라인 공간을 넘어 그날 처음으로 현실 공간에서 표출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인 500여 명의 대한항공 직원들은 그동안 나만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었음을, 말을 못했을 뿐 모두 같은 마음이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자신이 청춘을 바쳐가며 일한 회사가 더는 망가지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개개인의 절박한 마음이 처음으로 집단적 움직임으로 표출된 그날의 기억은 그래서 내게 더욱 소중하다. 또한 그 움직임이 발전되어 지금의 직원연대노조와 내가 있기에 그날의 일을 모든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고자 한다.
1부
신기루 뒤에 숨다
모든 일은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상이 온통 녹음으로 물든 2018년 5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었다. 기장, 객실 승무원, 일반 근무직 등 저마다의 유니폼을 입은 대한항공 직원들은 혁명과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두 손에는 촛불을 든 채 구호를 외쳤다.
“조양호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들의 손에는 ‘우리가 지켜낸다! 대한항공!’, ‘돈에 환장한 조씨 일가! 창피합니다!’, ‘I love 대한항공’, ‘기본 인권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쓰인 피켓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마주선 채로 믿기지 않는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그 순간,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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